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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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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정체

입력
2012.05.1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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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 원치 않는 시점부터 나는 순차적으로 홀홀히 눌어붙어 있네요 아버지가 만삭 어머니 배를 차고 떠났을 때 난 그녀 뱃속에서 나도 모를 표정을 나도 몰래 지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 코를 닮은 내 매부리코를 매일 들어 올려 돼지코를 만들 때도 그러다가 후레자식은 어쩔 수 없다며 왼손으로 내 머릴 후려칠 때도 나는 징그럽게 투명한 표정을 지었을 거예요 여자에게 술을 먹이고 나를 그녀 안으로 들이밀었을 때도 다음날 그 왼손잡이 여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내가 궁금해한 건 그 순간을 겪는 나의 표정이었어요 은밀하고 신비해요 모든 나를 아무리 잘게 잘라도 단면마다 다른 표정이 보일 테니 나를 훔쳐볼 수만 있다면 눈이 먼 피핑톰(peeping Tom)이 소돔 소금기둥이 돼도 좋아요 거기, 거울을 들이밀지 마세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맑게 훔쳐보지 않는 한

한 선배를 좋아했어요. 근처 헌책방에 데려가서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이나 장 콕또의 시집을 골라주던 사람이었죠. 어느 날 버스 정거장에 그가 외로이 서있었어요. 정면으로 걸어갔는데도 저를 못 알아보는 거예요. 한없이 쓸쓸한 실존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그 부조리한 표정. 그래서 물었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그 표정의 정체를 엿볼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응, 토큰을 어디서 사야 하나 하고.

버스를 타려면 토큰이 있어야 했던 시절이니 정말 오래 전 일이군요. 하하 시인이 옳아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그래서 완전무결한 나르시시즘은 불가능한 거예요. 지금 나는 햄릿마냥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누가 본다면, 핸드폰 충전하는 데가 대체 어디야? 난처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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