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주법(禁酒法)의 명백한 실패가 아직도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법률이 창출한 놀라운 효과들, 즉 불법의 만연이라는 완벽하고 심오한 역설, 입법의 의도와 결과의 극적인 불균형. 이 세기적 스캔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의 욕망은 인위적 제도로 규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규제의 대상이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잡은 것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100년에 가까운 시간의 간극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게임 규제 정책도 본질적으로는 이와 다르지 않다. 정부의 게임 규제가 항상 미봉책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정책이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통제하기 어려운 인간의 욕망 그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셧다운제가 실효성이 미미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셧다운제 도입 한 달 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3개 게임 업체의 대표적인 전체이용가 등급 게임 6종의 심야시간 평균 동시접속자는 겨우 4.5%밖에 줄지 않았다. 타인의 주민번호를 도용하는 범법은 더욱 늘어나고 게임 업체들은 폭력성이나 욕설을 추가해 연령등급을 올려 게임을 출시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게임이 청소년들에게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단순히 그것을 금지시킨다고 해서 규제가 성공할 리 없다.
그러나 학생의 주장은 직관은 옳은데 논증은 틀렸다. 셧다운제를 바로잡기 위해 학생이 제시한 방법들을 살펴보자. 그 중 첫째는 게임업체들이 이기주의적인 동기를 버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종교적 사명감에서 금주법을 생각해 낸 것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기업이 이윤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조금도 비난할 것이 못 된다. 그것이 우리 사회체제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결과로 생기는 부작용이지만 사명감을 강조하는 것이 그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사명감 때문에 공부에 매진하는 학생은 없다. 이것은 기업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런 논리는 오히려 학생들이 게임을 하는 행위 자체가 미래세대의 주인공으로서 사명감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반격을 자초하기 쉽다.
학생이 제시한 두 번째 방법은 주민번호 도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옳은 말이다. 그것이 실효성이 있다면 말이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선언적인 의미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법이 가능하다면 살인이나 절도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도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이나 지각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법률이 어떤 행위를 금지한다고 해서 불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주법 사태에서 보듯이 범법이 만연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대책은 비록 의도는 순수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공허하다.
마지막으로 학생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근본적인 게임중독의 치료를 주문하고 있다. 단편적인 게임 규제보다 심리치료가 더 바람직한 방법이라는 데 동의하고 꼭 필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후적 치료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오늘날 게임이 청소년에게 빠트릴 수 없는 문화적 코드가 된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게임 말고는 청소년들이 함께 즐길 여가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게임이 아닌 다른 건전한 대안적 문화가 요청되는 이유다. 규제와 억압보다 자발성에 의한 해결이 훨씬 효과적이고 지속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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