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빈방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빈방

입력
2012.05.14 11:31
0 0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 왔나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 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왜 9족을 멸했는지 알 것 같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권력자의 친족에 대한 특혜 의혹이 확증되지 않은 진실로 떠도는 날들. 이름 하나로 너끈히 9족까지 이득을 챙길 수 있다면 처벌도 9족까지 연좌제로 하던 동양의 옛 제도도 타당한 면이 있는 것 아니냐 분통을 터트립니다. 화를 내다 시를 보니 더 쓸쓸합니다.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지… 쌍용차 희생자 추모문화제에서 심보선 시인은 22명의 고인들을 향해 이런 시구를 낭송했어요. "그때 누군가 당신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동지, 아니에요, 형, 아니야, 친구,/ 제발, 제발,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시를 들으며 또 다른 9족론을 떠올립니다. 우린 정리해고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처마 밑에서 우는 자들의 9족이기도 한데. 우리가 슬픔 한잔 들이키고 함께 한다면 권력의 9족쯤이야 죽이지 않아도 너끈히 멸할 수 있는데.

시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