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산책자/애스트라 테일러 엮음ㆍ한상석 옮김/이후 발행ㆍ364쪽ㆍ1만8000원
'철학자들은 죽었는가? 철학자가 90분이 넘는 시간 동안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졸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7쪽)
다큐멘터리 감독 애스트라 테일러는 고민했다. '지금 여기'를 말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담되, 관객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할 것. 상아탑에 갇힌 철학을 현실로 끄집어내기 위해 그가 고안한 방법은 학자들과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마사 누스바움, 피터 싱어 등 우리에게 친숙한 학자를 비롯해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 8인의 인터뷰 다큐 '성찰하는 삶'(2008)은 이렇게 만들어졌고, 감독은 뒷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감독은 먼저 철학자들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를 섭외했다. 뉴욕 맨해튼 5번가부터 토론토 국제공항, 런던 시 외곽의 쓰레기 하치장까지 다양하다.
쓰레기 하치장을 선택한 학자는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과 영화 스태프들은 오렌지색 조끼에 노란색 안전모를 쓰고 생태에 관해 심각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대화를 나눈다. 지젝은 "생태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은 늘 신비화를 수반한다"며 "생태는 대개 인간의 오만함, 지나친 개발에 대한 징벌로 해석된다"고 꼬집는다. 조화롭고 완전했던 자연 같은 신화적 상상력이 작동하며 '현존하는 세상이 최선의 세상'(270쪽)이라는 보수 이데올로기를 만든다는 주장이다. 지젝은 생태 운동 역시 약간의 변화를 도모하며 세상의 아무 것도 바뀌길 바라지 않는 '거짓행동'으로, 사람들은 "정말 무엇인가를 해야 할 순간(이를테면 혁명)을 뒤로 늦추기 위해서"(299쪽) 친환경 제품을 구입하고, 재활용한다고 주장한다. "나에게는 멋진 초원이나 쓰레기가 모습을 감춘 곳이야말로 궁극적인 공포입니다."
퀴어 담론의 창시자이자 동성애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감독의 여동생 수나우라 테일러와 함께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그려진 샌프란시스코 슬럼가를 걷는다. 선천성 관절굽음증을 앓는 수나우라와 리베라의 부인 프라다 칼로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화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버틀러와 수나우라는 이 거리에서 몸의 정치성과 상호의존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수나우라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손 대신 입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몸을 창조적인 도구로 여기게 됐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사물의) 본질이나 이상적인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사물의 배치가 있을 뿐'(340쪽)이라는 들뢰즈의 '배치' 개념을 도입해 사람들이 손, 발, 입, 항문 등 신체를 사용하는 방식은 고도로 규제돼 있으며 성(性) 정체성을 인식할 때도 이런 규제가 작동한다고 꼬집는다. 또한 먹고 마시고 걷고 사랑하는 인간의 행동은 상호의존을 전제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몸은 그 자체가 의존성의 장소'라고 말한다.
학자들은 21세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장소인 뉴욕 일대를 산책하며 시장, 민주주의, 세계화 등 시대적 과제, 진리, 의미, 윤리, 정의 같은 철학의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답한다. 피터 싱어는 명품 상점들이 즐비한 뉴욕 맨해튼 5번가를 걸으며 소비 윤리에 대해 말하고, 마이클 하트는 센트럴파크 내 호숫가에 배를 띄워놓고 "혁명에 어울리는 장소는 어디인가?"란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진리, 의미, 윤리, 정의 같은 진지한 주제로 학자들을 만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먹고, 마시고, 걷고, 사고, 팔고, 사랑하는 사소한 모든 행위들이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고 강조한다.
인터뷰에 응한 학자 모두 철학의 대중화를 중요한 과제로 여겨서인지, 대화가 진지하면서도 위트 넘친다. 학술적 개념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데다 각 학자들의 학문적 맥락을 알리는 구절은 따로 정리해두어 입문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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