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눈이 호강이라도 한 느낌이다. 흑백의 신문 지면 한귀퉁이였지만 박수근, 톰블리, 장샤오강의 그림이 나란히 실려 있는 것은 눈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그 중 박수근과 톰블리의 작품은 부실 저축은행 영업정지 직전인 지난 3일 은행 돈 200억원을 빼돌린 후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붙잡힌 미래저축은행 김찬경 회장이 소유하고 있던 것이다. 미래저축은행이 구조조정 압박을 받고 있던 지난해 9월 김 회장은 그림 5점을 담보로 하나캐피탈로부터 145억원의 유상증자를 받았다. 박수근의 그림 '모자(母子)와 두 여인' 등 3점, 김환기의 '무제', 그리고 톰블리의 '볼세나'까지 5점의 담보 가치는 200억원 정도로 평가됐다.
김 회장이 갖고 있던 5점의 그림은 명작이라는 이름에 손색없는 작품들이다. 특히 박수근의 1964년 작인 '모자와 두 여인'은 도록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귀한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이 부실ㆍ비리 저축은행의 비자금 마련과 탈세의 수단으로 쓰였고, 그리고 돈이 급할 때는 경매에 나와 처분된 것이다.
지난 3월 중순 언론에 '한국 미술시장이 되살아난다'는 요지의 희망적인 기사가 일제히 보도됐다. 서울옥션이 개최한 메이저 경매에 근현대 작가들의 대표작이 대거 출품돼 억대 경매작이 속출하고 3년 만에 77%라는 최고 낙찰률을 기록, 그간 침체됐던 미술시장이 봄바람에 활기를 되찾을 조짐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이 경매에서 박수근의 1962년작인 '노상의 여인들'이 6억2,000만원에 낙찰돼 최고가를 기록했고, '모자와 두 여인'은 4억4,000만원에 팔렸다. 두 작품 다 김 회장 소유로 돼 있다가 하나캐피탈에 담보로 잡힌 후 이날 경매에 나온 것이었다.
이 경매에서는 또 예금보험공사가 부실 저축은행의 대주주들로부터 압류해 출품한 다른 4점의 작품도 모두 낙찰됐다. 요즘 미술판에서는 이런 그림들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이른바 '예보 컬렉션'이다. 지난해 저축은행 사태의 시발이 됐던 부산저축은행은 무려 2,000억원대에 달하는 미술품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예금보험공사가 이들 저축은행에서 압류한 작품들을 가리키는 예보 컬렉션은 국내는 물론 해외 경매에 출품돼 미술시장에 활기를 더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떻게 봐야 할 현상인지, 아무튼 그림에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김 회장이 이들 그림을 갖게 되는 장면에서는 서미갤러리라는 화랑이 다시 등장하고, 역시 영업정지된 솔로몬저축은행도 등장한다. 그림을 매개로 희한하게들 엮여 있다. 서미갤러리는 삼성, 오리온 등 재벌그룹의 비자금 사건에서 단골로 등장한 바로 그 화랑이다. 김 회장은 서미갤러리가 갖고 있던 그림들을 담보로 285억원을 대출해줬다. 서미갤러리가 돈을 갚지 못하자 그림들은 당연히 미래저축은행 소유가 되어야 했지만 김 회장은 자신 개인의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담보로 하나캐피탈에서 유상증자를 받았다. 솔로몬저축은행은 미래저축은행과 상호 대출을 해주고 각각 증자한 정황이 발견됐는데, 서미갤러리로부터 증자를 받았고 그 돈에 미래저축은행의 대출금이 섞여 있는지는 몰랐다는 것이 솔로몬저축은행 측의 주장이다.
한 저축은행 회장은 자신의 딸이 그린 그림을 은행이 비싼 값에 사도록 한 의혹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퇴출 당한 또다른 저축은행 대주주는 자신이 소유한 미술품 수십 점을 은행에 감정가보다 비싼 가격에 사들이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미술품은 비자금 조성, 탈세, 권력층에 대한 선물용 상납 등 전통적인 경우는 물론 이처럼 치졸한 개인적 치부를 위해서도 이용되고 있다.
미술품이 이런 비리에 손쉽게 이용되는 이유는 사실 간단한 데 있다. 미술품 거래에 세금이 매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팔렸는지 정확히 알 수도 없다. 미술품은 아름답지만 그 거래의 이면은 어둡고 음험하다. 1990년대 들어 미술품 양도소득세 부과 방안이 마련됐지만 미술시장 침체 등의 이유를 앞세운 화랑업계 등의 반대로 지금까지도 도입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미술계의 사정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예술작품이어야 할 그림이 각종 비리 사건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것을 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하종오 부국장 겸 사회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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