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기억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나쁜' 그 무엇이었다. 드라마를 본다는 것이 떳떳할 리 없었고,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면 비웃음을 각오해야 했다. '여로'나 '아씨'가 아무리 인기를 모아도, 텔레비전은 여전히 '좋은' 뉴스/다큐멘터리와 '나쁜' 드라마/코미디로 구분되었다.
드라마는 '아줌마'들이나 보는 저급 오락으로들 믿었고, '아저씨'들은 드라마의 유치함에 질색하는 흉내라도 내야했다. 물론 "얼마나 더 유치해지는 지 보려고" 드라마를 시청한다는 아저씨들도 많았지만.
드라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놀라울 만큼 변했다. '뿌리깊은 나무'나 '해를 품은 달'을 모르는 '아저씨'는 세상사에 관심 없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고, 소위 한류 드라마의 제작진은 국위와 국익에 기여하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방송 3사의 연간 드라마 제작편수는 80편을 상회하고, 종편과 케이블까지 포함하면 연 200편 가까이 될 전망이다. 더 이상 드라마는 저급문화의 대명사가 아니다. '명품'이니 '웰메이드'니 하는 수식어가 붙은 드라마도 많아지고, 드라마 시청은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텔레비전 드라마계에 비평문화는 부재하다. 전문 비평가랄 사람도 없고, 비평의 지면도 극히 제한적이다. 신문의 드라마 관련 기사들은 대개 단순한 프로그램 소개나 배우들의 화제성 에피소드들, 혹은 홍보 냄새 짙은 낯간지러운 내용들이다. 신랄한 비판이 등장할 때도 있지만, 윤리적 관점에서 막장 드라마를 비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은 드라마'에 대한 논의도 합의도 없다. 이것이 드라마 비평이 희소한 이유이자 드라마 비평의 부재가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교육적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라 믿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윤리위원회식 사고인데, '건전한 사회기풍을 고양하는' 훈훈한 드라마가 좋다는 식이다. 인기 있는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라 믿는 경우도 있다. 덴마크의 미디어학자인 슈뢰더는 드라마의 질적 수준은 시청자의 관점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아마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성이나 실험성이 뛰어난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라 믿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으로 더 높게 인정받는 분야, 이를테면 미술이나 영화의 평가기준을 빌려오는 식인데, 이를 통해 문화적 권위를 부여받으려는 것은 대중예술의 숙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리교과서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얻기란 쉽지 않고, 시청률만 고려하면 예술성이 떨어지며, 실험정신 뛰어난 드라마는 종종 선정적이라 비난을 받는다. 또 있다. 최근 종영된 '아내의 자격'은 완성도나 연기, 연출력 측면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았지만 종편 채널 드라마라는 점 때문에 시청 자체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의 시각에서는 '아내의 자격'이 '좋은' 드라마가 될 수 없다. 제작사나 방송사가 어디인지조차 드라마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이 역시 대중예술이 감당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좋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골라내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기준은 없다. 그러나 출발점은 공유해야 할 듯하다. 드라마는 평범한 많은 사람들을 타깃으로 만드는 대중예술이라는 점이다. 예술가 개인이 고뇌의 결과물로 내놓는 그림 한 점과는 구별된다. 드라마 텍스트 안에 머물며 서사구조와 영상미와 음향과 편집만을 평가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드라마의 평가기준이 돈 주고 찾아와 보는 연극이나 영화와는 달라야 하는 이유이다. 전문가 한 두 명이 기준 하나 만들어 툭 던져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비평의 장이다. 비평의 장이 튼튼해져야 좋은 드라마에 대한 고민이 가능하고, 그 고민의 결과가 좋은 드라마 제작으로 이어질 것이다. 윤리성을 따지고, 관행을 욕하고, 법 장치 만들겠다며 시간을 다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훌륭한 드라마 비평가들이 많아지고 제대로 된 드라마비평이 넘쳐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일상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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