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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내가 '핑' 하면, 네가 '퐁'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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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내가 '핑' 하면, 네가 '퐁' 했으면

입력
2012.05.10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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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코리아'가 개봉했다. 탁구로 남북 단일팀을 만들어 1991년 일본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 대회에 참가, 우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당시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넣은 '코리아기'를 휘날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생각했다. "통일이 되면 저걸 국기(國旗)로 쓰는 건가. 국기 그리는 데 시간이 한참 걸리겠군." 그리고 또 생각했다. "아리랑이 국가(國歌)라면 4절까지 외우느라 진땀 뺄 일은 없겠군."

허리 높이의 자그마한 녹색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볍고 통통 튀는 공을 주고받는 탁구. 탁구는 한때 전국적인 레저 스포츠로 각광 받았다. 동네에는 꼭 탁구장 하나씩은 있었고, 탁구 잘 치는 오빠는 성당이나 교회에서 가장 '핫'했다. 당구장 가는 교회 오빠는 별 볼일 없었지만, 탁구장 다니는 교회 오빠는 별처럼 반짝였던 것이다. 몇몇 여학생과 탁구장에 가는 것은 당구장만큼 위험 부담이 없었다. 탁구는 전 국민에게 자긍심과 희열을 안겨준 건전한 종목이다. 세계선수권에서 처음 우승한 구기 종목도 탁구다. 당시 올림픽 때마다 탁구는 '효자 종목'이라 하여 기대 받고, 사랑 받았다.

탁구장에는 탁구 선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유남규, 김택수는 물론이고 스웨덴의 탁구 영웅 발트너에서 벨기에의 장 미셸 등 유럽 선수들까지. 아직 중국 탁구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기 전이었고, 그래서 늘 흥미로웠다. 친구 넷이 모이면 탁구장에 가 복식도 치고 단식도 치고 바꿔서 치고 쉬었다 쳤다. 계속 지면 오기가 생겨 이길 때까지 쳤다. 스매싱 한방 먹고 공을 주우러 가며 가슴을 쳤다. 그렇게 우리는 탁구를 쳤다.

탁구를 칠 때는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 상대의 리시브가 조금만 뜬다 싶으면 냅다 공격을 하는 유형이 있다. 탁구대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끈질기게 수비를 하면서 상대방의 실수를 기다리는 친구도 있었다. 이상야릇한 서브를 넣으면서 얌체처럼 점수를 따는 녀석도 있다. 왼쪽과 오른쪽을 넓게 사용하면서 상대방을 똥개 훈련시키는 탁구를 즐기기도 했다.(그게 나였다는 사실을 살짝 고백한다)

사실 그런 탁구는 진짜 탁구가 아니다. 고수들의 탁구는 경기보다, 경기 전에 서로 몸을 풀며 주고받는 워밍업에 있다. 치기 좋은 각도로 일정한 속도로 스트로크를 건네고 받는다. 끊김이 없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할 기세다. 핑, 퐁, 핑, 퐁 하는 박자에 따라 춤을 춰도 될 지경이다. 진정한 고수란 역시 일정한 박자에 있는 것이다. 박자가 맞는 상대가 나타나야 경쾌한 리듬에 맞춰 공도 주고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탁구가 스포츠 외교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국과 미국이 교류를 시작한 것도 탁구 대회부터였다. 물론 미국인은 중국 사람이 그토록 탁구를 잘 칠 것이라 생각은 못했겠지만. 탁구를 매개로 해 미국의 전자제품, 미국 중산층의 안정적인 삶, 자본주의의 안락함을 중국에 알리려는 미국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은 미국의 리듬을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된 것이다. 이들은 오늘도 핑퐁, 핑퐁 주거니 받거니 중이다.

시인 중에서도 탁구 고수가 많다. 시인 장석남은 고가의 개인 탁구채를 휴대하고 다닌다. 시인 박형준은 연희문학창작촌 입주시절 탁구장의 제왕이 되기도 했다. (한때 탁구 선수였다고 주장하는) 시인 김언은 탁구장에서만큼은 원빈 부럽지 않다. 나 같은 하수는 빠지고 그들이 탁구를 칠 때, 그 리듬을 난 좋아한다. 청명하게 울리는 탁구공 소리, 빠르게 이동하는 공의 움직임이 좋다. 무엇보다, 서로의 상대가 되어주는 그와 또 다른 그가 좋다. 그것을 우리는 파트너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1991년 남북 단일팀은 성공했다. 지금은 남과 북은 단일팀조차 꾸릴 여력이 없어 보인다. 지난한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우리, 같이 탁구 치려면 멀었다. 내가 핑, 네가 퐁 탁구 쳤으면 좋으련만. 탁구를 치려면 일단 탁구장 가야하고, 그곳에는 테이블이 있다. 남과 북, 일단 서로 테이블에 마주 앉자. 탁구는 나중에 치더라도.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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