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핀란드 15세 아루뜨 "한달 직업체험 하니 미래가 환해졌어요"
'진학 지도만 있고 진로 지도는 없는 나라.' 우리나라는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지만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가 전과, 편입, 재수 등으로 방황한다.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도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모르고 끊임 없이 미래를 고민한다. 중고교생 대부분이 적성보다 성적에 따라 진로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제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우리나라와 늘 선두를 다투는 핀란드는 중학교 때부터 현장 직업체험과 탄탄한 진로교육으로 학생의 적성을 일찍 파악하고 진로를 설계한다. 기초 의무교육을 마친 학생 중 절반이 직업고에 진학하고 성적이 좋은 학생이 직업고를 선택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학생은 원하는 일을 찾아서 좋고 기업은 필요한 인재를 고용할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연간 20조원에 육박하는 막대한 사교육비에 비해 진로 교육은 한 없이 초라한 게 우리의 현실이다. 서울시교육청, NH농협은행과 청소년 진로직업체험의 기적(청진기) 캠페인을 벌이는 한국일보는 진로교육 벤치마킹을 위해 핀란드의 교육현장을 찾았다.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일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체험하니 뚜렷한 목표가 생겼어요."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북서쪽으로 187km 떨어진 제2의 도시 탐페레. 제지업과 정보기술(IT)산업이 발달한 이 도시에 위치한 노리중등학교에서 2일 만난 9학년 졸업반인 아루뜨(15)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루뜨의 장래희망은 컴퓨터 보안시스템 엔지니어다. 아버지 직장 문제로 10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내며 컴퓨터를 가까이 하게 된 아루뜨의 꿈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막연히 '컴퓨터를 많이 쓰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하고 싶은 컴퓨터 보안 업체를 여럿 꼽을 수 있다. 이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컴퓨터 보안 산업의 전망이 어떤지도 안다. 아루뜨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차례 직업체험이 열쇠
아루뜨는 지난해 10월과 11월에 탐페레 지역의 한 컴퓨터 보안업체와 탐페레대 정보통신기술(ICT)센터에서 2주씩 직업체험을 했다. 보안업체에 간 첫날 아루뜨는 인사팀으로부터 회사 규모와 구체적인 업무, 매출,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대해 들었다. 이튿날부터 하루 6시간 동안 멘토 엔지니어를 따라다니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실제로 다루는 프로그램이 뭔지, 보안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복사나 전화 받기 등은 그저 잔심부름인 줄 알았지만 회사가 어떤 업체와 거래하는지, 업계 전망은 어떤지를 어깨 너머로 알게 됐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엔지니어가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루뜨는 "평소에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도 적합한지 고민이었는데 복잡하고 까다로운 보안업무가 나와 맞았다"고 말했다.
기업과 학교가 함께 인재 양성
핀란드의 청소년 직업체험은 1980년대 전국적으로 시작됐다. 인구가 524만명으로 우리나라의 10분의 1밖에 안돼 인적자원이 소중한 까닭에 일찍부터 청소년 직업교육에 신경을 쓴 결과다.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는 청소년 직업체험을 권장하고, 각 지자체나 학교가 구체적 가이드라인을 만드는데 아루뜨 같은 중학생에게 체험 기회를 제공하는 경로가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대표적으로 탐페레와 헬싱키의 직업체험 프로그램 사이트(www.toponetti.fi, www.pkstet.fi)에는 식당, 호텔, 건축사무소 등 직업고 출신이 선택할 만한 직종부터 변호사 사무실, 병원 등 대학 졸업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종까지 청소년들에게 멘토링 기회를 주는 기업의 정보가 망라돼 있다. 희망 학생이 이 사이트에서 신청서를 작성해 접수하면 적당한 업체와 시기 등을 섭외해 준다.
25년 경력의 노리중등학교 진로상담교사 유까 부오리네씨는 "학생이 교사와 상담을 거쳐 체험계획을 세운 후에는 학교, 기업, 지역사회가 함께 체험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한다"며 "2주 간의 직업체험 기간이 끝나면 체험 결과와 소감 등을 발표하는데 적성을 알게 돼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 학교의 또 다른 진로상담교사인 에발레나 멜까스씨는 "이 사이트를 통해 체험 가능한 업종은 의료업, 미용산업, IT산업 등 크게 14개 영역인데 여학생의 경우 미용과 디자인산업, 남학생의 경우는 IT산업과 자동차 정비산업에서 신청이 폭주한다"고 말했다.
민감한 시기에 적성 알아야
핀란드에서 15세가 중요한 이유는 정규교육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중학교를 마치면 일반고와 직업고 중 하나를 택해야 하고, 고교 선택이 장래 직업선택의 첫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주로 15세에 직업체험을 갖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오리네 교사는 "이 시기에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학생들이 자신의 적성을 파악해 직업고 혹은 일반고를 선택할 수 있다"며 "9학년(중3) 학생이 잘못된 선택?하지 않도록 중학교 3년 동안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말했다.
청소년의 발달시기 상으로도 15세는 예민한 시기다. 에로 로뽀 핀란드 국가교육위원회 자문위원 겸 탐페레대 교사교육학과 교수는 "15세는 인생에 있어 구체적인 목표의식을 갖게 되는 첫 번째 시기로 자아에 대한 정체성이 형성된다"며 "이 때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도록 교사가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체험으로 진로에 대한 확신을 얻은 핀란드의 15세 아루뜨는 핀란드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8월 탐페레에 있는 한 직업고의 컴퓨터 보안 분야 학과에 진학한다.
탐페레(핀란드)=정승임기자 choni@hk.co.kr
■ 중학생 34% "장래희망 없어요"… 학부모 75% "진로상담 받은 적 없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나도 모르겠어. 그게 어떤 일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중학교 3학년 딸을 둔 학부모 김모씨는 자녀에게 장래 희망을 물을 때마다 번번이 이런 답을 되받는다. 아이의 적성에 맞을 것 같은 직업을 이야기해 봐도 아이는 막연해서 모르겠다는 반응뿐이다. 영어를 잘 하는 아이에게 "외국어고를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도 딸은 "외고를 왜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답할 뿐이다.
진로와 관련된 모든 질문에 '몰라'를 연발하는 것이 비단 김씨 자녀만은 아니다. 한국고용정보원의 진로교육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장래희망이 아예 '없다'고 답한 학생 비율이 중학생 34.4%, 고등학생 32.3%에 달했다. 진학하려는 고등학교 계열을 결정한 이유로 '원하는 장래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분명한 목적을 밝힌 중학생은 10.6%에 그쳤고, 대부분은 ▦특별한 이유 없음(29.2%) ▦성적에 따라(19.2%) ▦원하는 대학을 가려고(15%) 등을 택했다.
입시ㆍ진학지도 위주의 공교육 체제에서 우리나라의 중학생들은 자신의 장래에 대한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고입, 대입 등 고비마다 치열한 경쟁이 버티고 있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할 시간이 부족한데다, 공교육에서도 이 고민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별로 재량수업 시간에 직업의 종류 소개, 직장인 선배와의 만남 등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강당식 교육에 그쳐 개인에게 특화된 정보를 얻으려면 결국 학생과 학부모가 직접 찾아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이를 개선하겠다며 교육과학기술부가 2009년부터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등과 관련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2010년에는 ▦직업체험 프로그램 확대 ▦매뉴얼 개발 보급 등을 골자로 한 '진로교육 종합계획'도 발표했지만 학교현장에서 체감하는 변화는 미약하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해 전국 초중고 학부모 2,613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학교 등으로부터 자녀의 진로적성검사 결과와 활용법'정보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65.5%가 없다고 답했다. ▦자녀의 진로탐색을 위한 기초 정보 ▦자녀의 진로계획을 위한 상담서비스도 받은 적이 없다는 학부모가 각각 68.3%, 74.9%였다. 2010년 전국 초중고 학부모 550명 대상 설문조사에서는 학부모들은 학교가 현재보다 더 중시해야 할 교육 내용으로 진로교육(50.2%·복수응답)을 1위로 꼽았다.
진로 탐색을 미루기만 하는 청소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방황에 빠지기 십상이다. 노경란 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우리 학생들의 경우 고입, 대입에 치여 진로고민을 미뤄뒀다 입시 점수에 맞춰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졸 취업자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한 결과 일찍 진로를 결정한 학생일수록 취업성공확률이 높았다"며 "어릴 때부터 분명하게 자신이 추구할 인재상을 확립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봉환 숙명여대 교육학과 교수(한국진로교육학회장)는 "학생들이 오히려 학교 공부 때문에 미래를 성찰할 시간을 뺏기는 상황"이라며 "교사들이 진로고민에 대한 자극과 정보를 주는 공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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