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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 칼럼] 비련의 궁중 무희 '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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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 칼럼] 비련의 궁중 무희 '이진'

입력
2012.05.0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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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너무도 아름다운 이유로 비련의 주인공인 된 궁중무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우아한 무용에 반한 젊은 프랑스 외교관이 그녀를 열렬히 사랑한 데서부터 비극은 시작됐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프랑스 외교관은 3대 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프랑시.

이진에게 사정없이 매혹 당한 그는 본국에서 소환 명령이 오자, 고종에게 자신의 사랑을 얘기하고 그녀를 '기증' 받아 프랑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가정교사를 들여 프랑스 말을 가르치고, 프랑스 문화를 가르쳤다. 그녀는 놀라운 재능으로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외로운 외국 생활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에 빠졌고, 몸이 쇠약해져갔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자 옛날의 생활로 돌아 간 빅토르 콜랭은 '여신'처럼 숭배하고 '천사'처럼 떠받들던 이진에게 소홀해졌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한국의 규방을 복원해 줄 정도로 관심을 잃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시 파견 명령을 받고 이진과 함께 조선으로 왔다. 그런데 서울에 오자마자 이진에게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어느 고관이 궁중에 소속된 노비인 그녀의 신분을 앞세워 기생들의 조직인 '교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뒤 얇은 금조각을 삼키고 스스로 생명을 끊어버렸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1905년 무렵에 2대 프랑스 공사로 조선에서 근무했던 끌라르 보띠에와 이뽀리트 쁘랑땡 두 사람이 쓴 라는 수필집이이라는 제목으로 2002년 무렵에 출간됐는데, 다양한 한국의 풍물을 소개한 이 책의 내용 중 35장 '궁중의 기생들과 한 한국 여인의 비극'이라는 짤막한 글에 위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이야기에 심취했다. 프랑스 공사와 결혼한 조선의 궁중무희, 그녀의 프랑스 생활, 귀환, 자살….오페라 '나비부인'과 비슷한 이야기이지만 뭔가 다르고, 예술가적 영혼을 지닌 한 여인이 프랑스 파리에서 겪었을 많은 사건과 혼란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몇 가지 의문점도 발견됐다.

첫째, 이진이라는 궁중무희의 존재를 증명해 줄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프랑스 공사와 결혼을 했다면 당시 궁중에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을 것인데 아직까지 그녀에 대한 국내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둘째, 그녀와 결혼했다는 프랑스 공사의 이름과 그의 출생지나 외교관으로서의 근무 기록은 어느 정도 밝혀졌는데, 그녀와의 결혼 여부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진은 그와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셋째, 그녀가 귀국한 뒤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갈 때 왜 빅토르 콜랭은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녀를 포기해 버린 것인가. 그녀는 버림 받은 슬픔 때문에 자결한 것인가, 아니면 신분의 족쇄에 얽혀 비참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항거로 생을 끊은 것인가.

이처럼 비밀스러운 안개에 싸여 있는 아름다운 무희의 이야기는 나에게 흥미진진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면 좋겠다는 구상을 하며 지내고 있던 중, 그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왔다. 김탁환의 (파리의 조선 궁녀)과 신경숙의 이 거의 동시에 출간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는 이미 뛰어난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 씌어졌지만, 두 소설의 구성이나 스토리나 분위기는 너무도 달랐다.

짤막하지만 흥미롭고 상상을 자극하는 '춤추는 여인'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진. 출생도 알 수 없고 생존 여부도 확인되지 않지만, 수많은 남성들의 찬미 속에 비극적으로 죽어 간 여인. 그녀의 삶은 여전히 나에게 한없는 상상의 날개를 달아준다. 비련의 궁중무희 이진은 또 하나의 소중한 문화콘텐츠다.

김명곤 동양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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