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금융회사에 다니는 김모(53)씨는 부서에서 명예퇴직 신청자를 받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아직 두 자녀가 대학교에 다니는 중이라 한 학기 등록금만 1,000만원에 달하는 데다, 신소재공학 박사과정에 있는 아들 학위 뒷바라지까지 하려면 최소 5년은 더 돈을 벌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노후자금 마련은 꿈도 꾸지 못했다. 김씨는 "저축은커녕 은행 빚만 늘다 보니 은퇴 후에 공인중개사나 아파트관리소장 자리에 재취업 하기 위해 자격 요건을 남몰래 알아보고 있다"며 "은퇴 연차가 한 자릿수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들의 불안감은 다 똑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은퇴를 앞둔 중년남성 사이에서 '은퇴 싱글족'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짝을 찾지 못한 사람들을 일컫는 '싱글족'이란 단어가 이제는 정년까지 한 자리 햇수만 남긴 가장을 가리키는 말로 변형돼 사용되고 있다. 기존 직장에서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생의 주기나 가정형편, 연금 등 여러 여건상 은퇴생활을 즐기기 어렵고 오히려 정년 이후 재취업을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세대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조모(52)씨는 요즘 동네에서 조그마한 탁구장을 개업할까 고심하고 있다. 정년퇴직 후 사업을 하자니 투자금이 만만치 않고 마냥 쉬자니 장남의 결혼자금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아쉬운 형편이다. 그는 자식 결혼을 앞두고 혹시 사돈이 얕잡아 볼까 싶어 새 아파트로 집도 옮기면서 매달 100만원에 달하는 대출금과 이자까지 갚아야 한다. 조씨는 "아들이 서울에 신혼집을 얻으려면 전세만 해도 1억원이 훌쩍 넘는다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교사라 정년퇴임을 하면 연금이 나오지만 그 돈으로는 턱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직장인의 평균 정년퇴임 연령은 53세. 은퇴 싱글족에 해당하는 45~55세 사이 경제활동인구는 650만명이다. 기대수명이 높아지다 보니 이들이 노동시장에서 벗어나 있는 기간은 25~40년에 달한다. 재취업 없이는 도저히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국민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연령도 통상 60세 이후이다 보니 50대 전후에 퇴직할 경우 빈곤층으로 떨어질 우려가 큰 상황이다.
이형종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은 "은퇴 싱글족의 경우 경제적으로 소비가 가장 많은 세대인데도 오히려 사회분위기상 조기 퇴직 쪽으로 떠밀리고 있다"며 "정년 연장에 대한 사회적 합의 도출은 물론 이들의 재취업을 체계적으로 돕는 정부 지원책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채희선기자 hsch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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