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부터 2박 3일 동안 소백산 천문대에서는 '융합' 모임이 하나 있었다.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와 한국천문연구원이 주최한 이 모임에는 SF 작가, 만화가, 편집자, 문화예술기획자, 영화감독,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과학자들이 참가했다. 오전과 오후 늦은 시간에는 과학자들의 강연과 문화예술가들의 발제와 토론이 있었다. 낮 시간에는 소백산을 등산하거나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나마 날씨가 괜찮았던 첫 날 밤에는 망원경을 통해서 토성의 예쁜 띠를 관측하는 행운도 누렸다. 저녁 시간에 시작된 브레인 스토밍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면서 밤을 넘겨가며 새벽까지 이어지곤 했다.
2009년에도 비슷한 행사를 기획한 적이 있었다.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서 SF 작가들과 천문학자들이 함께 소백산 천문대에서 워크숍을 했었다. 만화 작가들과는 보현산 천문대에서 비슷한 성격의 워크숍을 열었었다. 이 두 번의 모임을 계기로 작가들과 천문학자들 사이에는 공적 사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소백산 천문대를 다년 온 SF 작가들의 단편 신작을 모아서 책을 내기도 했다. 보현산 천문대에서 내가 했던 외계생명체 강연에서 영감을 얻은 어느 만화가는 그 영감을 웹툰으로 만들어서 포털사이트에서 연재하기도 했다.
워크숍은 끝났지만 모두들 아쉬움과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었다. 몇몇이 주동이 되어서 페이스북에 비공개 그룹을 만들었다. 이번에 참가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 2009년 워크숍이나 다른 '융합' 모임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도 초청되었다. 그룹이 문을 열자 그동안 소통의 욕구를 어떻게 억누르고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댓글이 130개가 넘어가도록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문화예술가들의 질문이 화두로 떠오르면 과학자들이 답을 달고 모두 같이 토론하는 열정적인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각자가 진행하는 행사에 초대도 하고 이벤트도 만들면서 오프라인에서도 이 모임이 자생력을 갖고 이어질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이기도 했다.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천문학자 한 명도 합류를 했다. 그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학과 문화예술의 만남의 현장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의욕과 열정이 넘쳐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 속에서도 작은 욕망의 회오리가 다시 일기 시작했다. 이제는 뭔가 제대로 된 문화예술과 과학의 융합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 같은 것일 터이다. 며칠 전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던 만화평론가도 비슷한 욕망을 드러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구호나 형식에 그치지 않은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융합의 토대가 마련된 것은 사실이다. 소백산 천문대 워크숍도 1년에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열릴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도 마련되었으니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 잡고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멈춰야 할 시기라고 다짐했다. 거대화되고 관료화 된 융합 운동이 가져올 필연적인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번 소백산 천문대 워크숍은 참관기 두 편을 쓰는 것으로 성과를 대신했지만,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성과에 대한 요구가 더 거세지고 커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렇게 멋진 융합의 장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는데 성과를 만들어서 갖다 바쳐야 하는 일에 이 소중한 자산을 낭비하고 희생하고 싶지 않다.
예술 작품을 정량적인 성과로 요구하는 분위기를 먼저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일에 전력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문화예술인들과 과학자들이 그냥 모여서 더 많이 더 즐겁게 같이 놀았으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꼭꼭 숨어있던 작품들이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튀어나와서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러고서야 화학적으로 융합된 작품이 탄생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역량을 쌓을 때다. 그러니 열심히 같이 더 놀자.
이명현 SETI코리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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