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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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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25>

입력
2012.05.0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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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은 언약하고 갔건만 그해 세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집 떠나던 무렵, 꼭 한 달 만이던가 뒤채 안방에서 엄마와 아침 밥상을 받았을 때였다. 너푼너푼 잘 자란 상추와 갈치속젓이랑, 양념하여 잘게 다진 황석어젓과, 들기름에 갠 된장을 곁들였고, 미역 오이냉국에 애호박나물 등속이었다. 이것들은 평소에 모두 우리 모녀가 좋아하는 여름 밥상이었는데, 내가 갈치속젓 맛을 본다고 젓가락 끝으로 집어 혀끝에 대어보다가 울컥, 토악질이 솟으며 돌아앉았다. 밥상머리에서 험한 꼴이 될까봐 마루 아래로 내려와 쭈그려 앉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너 혹시……

엄마가 수저를 던지고 뛰어내려와 내 등을 두드려주면서 말했다.

애 선 거 아니냐?

나는 멍하니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눈에 그렁그렁 물기가 비치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것아, 왜 말을 안 했어?

나는 아침 먹을 생각도 없어서 툇마루에 앉았더니 엄마도 몇 숟갈 뜨다 말고 밥상을 물렸다.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녀석은 어디 가서 싸돌아다니는 거여. 안 되겠다, 안 서방 장사 나다닐 제 사람을 풀어서라두 수소문을 해야지.

차츰 배가 불러왔고 점점 더 그이가 보고 싶었다. 신통이 돌아온다던 동지섣달이 다가왔을 때, 나는 만삭이었다. 서방 없는 년이 애부터 낳았다고 장터 사람들 사이에 말이 날까봐 나는 나다니지도 못했고, 엄마는 아는 상인들에게 개가를 시켰더니 송방 차인을 만난 덕에 연말에야 돌아온다고 풍을 치고 다녔다. 대개 송도 상인들이 전국을 돌며 장삿길에 나섰다가 설을 앞두고 귀가한다 하여 생과부를 송도 댁이라고 부르는 말도 있었다. 그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찹쌀 경단 빚어 정성스레 끓인 동지팥죽을 먹일 일도 없게 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잠이 깨어 찬방에 쪼그리고 앉아 식어버린 팥죽의 빙판처럼 매끄럽고 곱게 앉은 앙금을 숟가락 끝으로 걷어먹다가 눈물을 한 방울 똑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엄마가 바느질하며 시름겨워 부르던 정요(情謠)를 나직하게 불러보았다.

나비 없는 동산에 꽃피면 무얼 하나

임 없는 방안에 단장하면 무얼 하나

나는 간다 나는 간다

못된 임 따라 나는 간다

마당 가운데 모두락불은

날과 같아 속만 타네

정월이 산달이라 아기 옷도 짓고, 누비요, 누비이불에, 기저귀 감도 장만했다. 내가 산통을 시작하자 엄마는 겁이 나서 받아낼 생각도 못하고 안 서방 처 부여 댁을 부르고, 찬모에게 미역국을 끓이도록, 막음이에게 해산 방 드나들며 심부름하도록, 장쇠와 안 서방은 앞채의 손님들이 뒷마당에 얼씬 못하게 지키도록, 이르고는 서성대고, 앉았다 일어섰다, 애고 우리 딸 죽네, 애고 그 잡놈, 중얼거리며 팔짱을 끼었다가 다시 풀고는 냅다 소리쳤다.

힘 줘라, 숨 참고 냅다 힘을 줘!

온통 아랫도리가 뜯겨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견디다 못해 혼절한 것이 언제였던가. 눈을 떠보니 등잔불이 희미하게 팔랑대는데 주위는 고즈넉했다. 생각만 연기처럼 가벼워져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은데 육신은 도마 위에 말라붙은 생선 부레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눈을 깜박이니 눈꺼풀이 움직이고, 손가락을 가만히 쥐어보니 손바닥에 닿는다. 아기, 우리 아기…… 하면서 옆을 돌아보는데 빈방 안이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내가 힘없이 부르니 막음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 어디 갔니?

아기 데리고 의원에 갔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혼절했다.

이튿날 날이 밝은 뒤 돌아보니 엄마가 옷 입은 채로 내 자리 옆에 새우처럼 쪼그리고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엄마의 등을 흔들었다.

엄마, 내 아기 어디루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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