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언제 다 외우나, 큰일 났네." 그는 빨간 줄이 죽죽 그어진 드라마 대본을 들고 들어서며 안절부절 못했다. 영화 '다른 나라에서'(감독 홍상수)와 '돈의 맛'(감독 임상수)으로 16일(현지시간) 개막하는 제65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찾는 기쁨보다 눈 앞의 일이 더 다급해 보였다. "내가 큰 일을 저질러 가지고 이렇다"면서도 "기분은 진짜 좋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영화 두 편 개봉과 인기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과 '더 킹 투 하츠' 촬영으로 바쁜 윤여정(65)을 2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칸영화제에서 두 번 레드 카펫을 밟게 될 그는 재벌 여회장을 연기한 '돈의 맛'에서 과감한 노출까지 감행해 대중의 시선을 모았다. 그는 "너무 그쪽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우아한 일간지는 그러지 맙시다"고 말했다.
-드라마 촬영 때문에 정신 없어 보인다.
"일주일에 딱 하루 쉰다. 보약을 먹어가며 죽어가고 있다. ('더 킹 투 하츠'에 함께 출연중인)이승기가 선물로 보약을 가져다 줬는데 약은 돈 내고 먹어야 효과가 있어 돈을 줬다. 이 세트장에서 저 세트장으로 다니느라 요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다. 영화도 칸에 가서나 봐야 할 상황이다."
-레드 카펫 밟을 때 입을 드레스는 골랐나.
"나이 들어 몸 많이 드러나는 옷은 못 입으니 고르기 쉽지 않다. 큰아들 일하는 회사에서 드레스를 하나 준다고 해 어제 한번 입어보긴 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에서 아들 부부로 나오는) 유준상이랑 김남주가 '어머니 드레스 봐준다'고 같이 갔는데, 사진 찍어 홍상수 감독한테 보냈더니 '너무 끼시네요'라는 문자가 왔다. 나이 많으니 초이스가 많지 않다."
-'돈의 맛'의 노출 장면이 마음에 걸리지 않았나.
"대본 받고 놀라 임 감독에게 바로 전화했다. '너무 늙은 여자가 이러면 거부 반응이 들고 불쾌감만 줄 것'이라고. 임 감독이 '그 장면이 사람의 본성을 드러내게 한다'고 하더라. 늘 그렇지만 내가 졌다. 미리 알았어도 했을 것이다. 임 감독에게 무한한 신뢰가 있다. 권력과 돈을 가진 여자의 만행을 보여주는 장면이니 이해가 갔다. 노배우가 한마디 반항도 않고 벗으라면 벗고 입으라면 입으니 고마워하더라. 그 연기를 통해 나를 표현할 수 있으니 나도 고마운 일이지."
-농도 짙은 침실장면은 난생 처음 아닌가.
"그렇지. 우리 젊었을 땐 '브라 팬티' 나온 정도가 상당히 높은 수위였지. 죽기 전에 다 하고 가라고 하느님이 그런 건가 보다.(웃음) 하지만 윤여정이 벗어봤자 뭘 보여주겠나. 영화 흐름 상 필요한 행위를 보여준 것이지. 나이 값 해야 하는 연기라 힘들었다. 젊으면 못하겠다고 앙탈도 부리고 신경질도 낼 텐데 내 아들보다 어린 배우(김강우) 앞에서 그럴 수도 없고…. 의연하게 많이 해본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느라 힘들었다. 촬영 뒤 스태프들이 (가운으로) 몸을 감싸려는데 내가 '다 비켜, 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했다더라. 이미 다 봤는데 뭐냐는 반응이었던 거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인가.
"재벌가에서 태어나서 자기가 돈에 중독됐는지도 모르는 여자 백금옥 역할이다. 늘 자신이 지닌 돈을 지키는 게 급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사실 돈의 맛을 알겠나. 그게 그리 맛있겠어? 돈 있는 사람들이 더 싸우잖아. 그 사람들에겐 그래도 돈이 절실하겠지."
-결국 악녀 역할이다.
"찍으면 찍을수록 그런 역할을 맡게 되더라. 악녀라고 해서 장화홍련의 계모처럼 눈에 불을 켜며 원색적으로 못된 짓 하는 건 아니다. 돈이 많고 그래서 권력이 따라오는 삶을 살다 보면 무서울 게 있겠나. 그런 모습 보며 사람들이 저런 못된 인간이 있나, 하는 거지."
-임 감독 영화는 도발적이라서 자신의 평소 취향과는 다를 듯한데.
"도발적이라서 배우들이 많이 꺼리나 보다. 홍 감독과 임 감독이 세상을 보는 눈이 각자 다른데 그건 각자의 취향이다. (나도 내 취향이 있지만 그래서)'저런 영화는 안 나가'할 정도로 난 어린 배우가 아니다."
-홍 감독 영화에는 어떻게 출연했나.
"'선생님 드라마 촬영 언제 끝나세요… 부안으로 내려와주세요'라는 전화를 받고선 합류했다. 도착하자마자 촬영을 하는데 대사가 영어라 기절하는 줄 알았다. 함께 연기한 (프랑스 배우) 이사벨 위페르는 달걀만 먹으면서 연기하더라. 야망과 욕심이 있어 참 대단하다 생각했다."
-칸에 가는 건 미리 알았나.
"'다른 나라에서'는 갈 줄 알았는데 '돈의 맛'은 못 가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임 감독에게도 문자도 못 보내고 있었다. 공식 발표하는 날 아침 유준상이 와서 말해줬다. '축하한다'고 임 감독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내가 '다음 번에 무료로 출연한다'고까지 했다더라. 난 기억 안 나는데 한번 내 휴대폰 뒤져봐야겠다. 홍 감독 영화도 무료 출연하고, 임 감독 영화도 무료면 난 어디서 돈을 받나.(웃음)"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더 있나.
"난 별 꿈이 없는 여자다. 내 だ?되면 다 시들하다. 젊은 배우와 멜로 하고 싶다는 나이든 배우들이 있는데 난 현실에서도 가당치 않은 그런 꿈 꾸지 않는다. 어떤 역이든 최선을 다해 하고 싶을 뿐이다.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웃음) 후배들이 놀린다. 선생님은 빌딩도 없다고. 뭐 있어도 관리하느라 골치 아프겠지만."
-칸영화제 수상을 조금이라도 기대하지 않나.
"홍 감독이나 임 감독이 상 받았으면 좋겠다. 내 수상을 바라는 건 노욕이다.(경쟁 부문 진출은) 나 젊었을 땐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971년)스페인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내가 ('화녀'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았는데 난 언론보도 보고서야 알았다. 우리 영화 위상 높아진 게 감사하고 대견하고 기분이 좋다. 2010년 칸영화제 한 파티에서 (할리우드 배우)제니퍼 로페스 등이 돌아다니는데 이정재가 훨씬 멋있더라. 내가 '정재야 너 저기 가서 왔다 갔다 해'라 말할 정도로.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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