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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19> 임철우 '봄날'의 5·18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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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작, 그곳] <19> 임철우 '봄날'의 5·18 광주

입력
2012.05.02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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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의 무수한 눈동자들… 분노와 공포·슬픔들은 어디로… 전남도청 앞 골목 골목을 걸으며 불현듯 목이 메다

그때 나는 카메라를 들고 회사를 뛰쳐나와 시청으로 행진하는 무리를 따라갔소. 이 사건을 기록하기 위해. 나의 체험(Erlebnis)을 보편적 경험(Erfahrung)으로 진술하기 위해. 고등학생 100여명에서 시작해 2008년 봄 시민들을 서울시청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게 했던 촛불집회. 사람들은 주체도, 형식도 전례 없는 이 사건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한 편으로 그 발랄한 정치적 감수성에 희망을 걸었소. 춤추고 노래하며 국가에 권리를 요구하는 시대에 잠시나마 환희를 느꼈소.

증언하기 위해, 나는 당신들 속으로 들어가 그 사건을 체험해야 했소. 허나 문제는 그 다음. 나의 증언이 객관적 진술로 승인받기 위해 나는 당신들과 거리두기를 할 수밖에 없었소. 다시 말해 내 진술의 객관성은 당신들 세계를 벗어난 지점에서 사건을 재현해야만 가능했다는 것. 그러니 당신들 무리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는 것.

나는 개별적(일 수밖에 없는) 체험과 객관적(이어야 하는) 진술 사이에서 비틀거리다 멈춰버렸소. 요컨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는 말. 혹자, 이 사태를 이렇게 말하오. 이 둘 사이 간극은 태초부터 그래왔으며,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칸트 <순수이성비판> , 이율배반 Antinomy)

나는 작가 임철우를 기억했소. 증언과 진술의 간극에서 평생 서있는 작가를, 그 간극 극복하기를 숙명으로 삼았던 작가를. 프리모 레비에게 아우슈비츠가 그러하듯, 김원일에게 6ㆍ25가 그러하듯, 임철우에게는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작가의 트라우마이자 이야기의 밑천이오. 작가는 찰나와 영겁이 겹치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을 이렇게 썼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몇 개의 돌멩이를 던졌을 뿐, 개처럼 쫓겨 다니거나, 겁에 질려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했거나, 마지막엔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기만 했을 뿐이다."(<봄날> 1권 '책을 내면서')

이 부채감은 임철우 소설질의 원천이 됐소.

그때 그는 문화전당(구 전남도청) 앞 광장에 있었소. 32년 전 그날처럼. 시골학교 교사를 꿈꾸던 청년은 중년의 대학 교수가 됐고, 광주의 기억과 상처를 되새긴 몇 편의 소설과 또 다른 소설 몇 편을 썼소. 최근에는 이전 작품과 소재도 형식도 다른 중편 5개 연작소설집을 마무리하고 있다고 하오. 해마다 5월이면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행사들에 참석하느라 분주하오. 다시 5월 광주에 선 그가 말하길, "80년 5월, 그때 나는 스물여섯, 대학 4학년생이었소."

"5ㆍ18을 들여다보면 중심단체가 몇 있었는데 그 중 들불야학이랑 민중극단체 광대가 있어요. 이 단체가 주축이 된 건 5ㆍ18 이전에 계엄령이 떨어지고 정치, 학생, 노동운동 주축들이 다 잡혀 들어가거나 도망친 '이상한 상황' 때문이었어요. 심지어 전남대 학생회까지 잡혀갔으니까. 나는 광대 멤버였어요. 광대에 들어간 건 79년 겨울이었는데 나는 문학청년이었고, 정의감은 있었지만 의식화된 건 없었어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마당극을 제대로 하려고 학교를 휴학했어요. 80년 봄이라는 게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잖아요. 김영삼, 김대중 두 양반 나오고, 달라진 세상이 온다고 온 나라가 희망에 부푼…."

5월 18일 아침까지만 해도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를 각색해 연습 중이던 작가는 계엄령이 내리자 친척집으로 피신했다 곧 거리로 나와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소.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의 참가 인원, 시각, 사망자수, 심지어 그 시각 텔레비전을 통해 한가하게 중계되던 야구 경기의 스코어까지. 그 물결에 휩쓸려 작가는 전남도청 앞으로 갔고, 마지막 날인 27일 집으로 돌아왔고,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 쓰고' 계엄군의 발포소리를 들었소.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5권의 소설로 풀었소. 80년 5월 광주의 열흘을 기록하는데 장장 17년이 걸렸다오.

그때 무석, 명치, 명기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 있었소. 맏이 한무석(30세)은 가출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 우연히 시민군에 합류했다 마지막 날 도청에서 사살되오. 광천동 공동주택에 기거하며 미순, 은숙, 봉배, 칠수 등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적 내부로 진입하는 그는 광주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소. 둘째 아들 한명치(26세)는 공수부대 하사로 광주에 투입되었소. 가해자의 상징이지만 한편으로 가해자 집단의 최하층부에 존재한 또 다른 피해자이기도 한 바, 그의 주변인들인 오하사, 유이병 등은 자신의 처지를 회의하다 비극적인 파멸을 맞게 되오. 셋째 한명기(20세)는 전남대 1학년생으로 민주화운동 기간 내내 투사회보(언론 보도가 금지되고 난 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일종의 삐라) 팀에 합류, 홍보 임무에 종사하다 마지막 날 새벽에 여자들을 도청 밖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 살아남은 인물이오. 대개 작가 개인과 주변인들의 경험은 이 명기를 통해 드러나고 있소.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을 현장 보고 형식으로 재구성한 소설은 한원구 일가 삼형제의 사연을 큰 줄기로 정 베드로 신부, 윤상현, 김상섭, 조영준, 이수희 등 실존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재현하고 있소.

친척이 빨치산 운동을 했다는 한원구 일가의 갈등은 작가의 전작 <붉은 산, 흰새> 와 맞닿아 있소. 이 전작 역시 작가의 트라우마와 관계된 바, 작가 말하기를 "내가 왜 광대에 들어가게 됐느냐 하면…. 삼일 밤낮을 얘기해야 하니까 그거까지는 여기서 얘기하지 맙시다." 그 긴 사연을 요약하자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와 당숙은 해방을 전후해 좌익에 합류한 후, 학교를 작파하고 고향에 내려와 좌익 청년단을 조직했소. 부친은 도중에 발을 뺐으나 당숙은 청년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6ㆍ25 때 인민군에 합류하여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소. 토벌대에 붙잡힌 당숙은 1982년에야 출감했고, 형은 부친의 과거 때문에 승진에서 탈락하오. 뚜렷한 전선도 없이 점령군이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혹은 그 반대로 수시로 바뀌면서 그 때마다 무수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고향 마을의 역사는 작가의 소설에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오. 특히 후퇴하던 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나타나서는 무작정 환영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을 쏘아 죽인 '나주부대 사건'은, 후에 영화화 된 작가의 장편 <그 섬에 가고 싶다> 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소.

<봄날> 은 5ㆍ18 이틀 전인 16일 새벽 산수동 오거리에서 시작해 마지막 날인 27일 전남도청 앞에서 끝나는데, 각 장마다 명시적 시간과 광주의 특정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소. 예컨대 '제5장 : 5월 16일 16:00 금남로 1가' '제 15장 : 5월 18일 12:00, 조선대학교 부근' 하는 식이오. 여기서 '구체적 장소에서 진행되는 사건'에 유념할 필요가 있소. '작품 속 시간은 사건의 추이를 보여줄 뿐, 사건의 성격은 각 장에 제시된 공간에 규정을 받고'(문학평론가 오창은) 있소. 작가는 말하오. "5ㆍ18이 갖고 있는 공간적 특성이 있어요. 서울과 달라요. 광주 시내는 골목이 많아요. 같은 시간대에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그것을 어떻게 담아낼까 생각하다가 모자이크 식으로 담을 수밖에 없었죠."

골목과 골목이 하나로 모이는 길이 도청 앞 광장이었으니,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이리로 모이는 건 당연지사. 그 열흘 간 "드라마 같이 뭐든 벌어지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당연지사. 한때 '광주의 명동'으로 불렸던 그곳은 지금 5ㆍ18을 기리는 문화전당이 새로 지어지고 있고, 분수대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소. 몇 해 전 새로 지어진 신시가지로 첨단 유행의 옷가게, 음식점이 옮겨가고 서울의 인사동 같은 거리만 남아 오랜만에 찾은 작가를 맞았소.

작가는 팔을 쭉쭉 뻗어 도청 근처 건물들의 내력을 설명하다, 골목 골목을 걸으며 그날 상황을 얘기하다, 갑자기 그 날의 기억이 밀려왔는지 목이 메었소. 작가는 "제일 중요한 건 계엄군이 퇴각하기 전인 초반 사흘(19~21일)"이며 "광주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그 사흘, 특히 21일 밤은 백병전을 방불케 했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소. "그 상황은 설명할 수가 없어요. 말하는 게 힘들기도 하고, 그런 말은 전달이 안 되기도 하고. 나도 그 상황을 겪었으니까 알지 안 겪었으면 못 믿을 거니까요."

작품은 이렇듯 작가의 체험이 긴밀히 엮여 있소. 작가 자신의 군대 경험과 5ㆍ18 활동은 둘째 명치와 셋째 명기의 에피소드에 투영됐고, 작가의 친구이자 민중극단체 광대 출신의 연극인 박효선은 실명으로 등장하오. 임신 8개월로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총격을 받아 숨진 최미애(소설에서는 최미현)씨는 대학 선배의 부인이었소. 작가는 "광대 후배 멤버가 11명인데 거의 대부분 감옥 가거나, 죽거나 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했다"고 말했소.

다시 '민중 속으로!'와 '세계 밖으로!'의 문제로 돌아와, 작가는 증언과 진술 사이의 간극을 어찌 극복했을까. 소설은 다중화자로 이 문제를 돌파하오. 소설 전반부 한원구 일가 삼형제가 서사의 주체로 등장했다면 '34장 5월 20일 육군 31사간 의무대'에 이르러서는 화자가 급격히 균열되오. 이전에 등장하지 않았던 의무장교 한영준, K일보 김상섭 기자, 정베드로 신부 등이 갑작스레 화자로 등장하고,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도 객관적 사실에 입각한 상황, 사건의 기록 형식으로 변하오. 작가는 소설의 기본 서사를 포기하면서까지 역사적 기록에 충실하고자 했소. 요컨대 수백, 수천, 수만의 개별적 증언을 엮어 보편성을 획득했던 것. 그는 "이 소설은 내 몫의 소설을 쓰겠다는 게 아니라 5ㆍ18을 최대한 진실하게 담아내는 게 목표였고 지금도 개인의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소.

'여러 인물들을 일종의 개별적인 렌즈 역할로서 동원시켜, 그 인물들로 하여금 한정된 시간대에서, 각자의 한정된 공간 영역을, 한정된 행동반경을 따라 각자 움직이게 했다. 따라서 소설은 그들을 행동반경을 좇아감으로써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이 조합적으로 형성되어지게 된다. 말하자면, 각자 상이한 직업, 나이, 계층을 지닌 다수의 인물들은 각자 특정한 장소와 시간, 특정한 상황과 사건들을 직접 체험하거나 목격하게 되고, 각각의 그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상황들을 하나씩의 모자이크 벽화 혹은 벽돌로 쌓아 올려져가면서 점차 전체적인 상황, 전체적인 벽화 그림을 만들어 내는 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1권 '책을 내면서')

허나 사람들은 모두 제 위치와 체험과 이해관계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데, 어떻게 참된 증언과 거짓 증언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상황을 제정신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객관적인 증언이라는 게 가능할까. 작가는 말하길, "제일 믿을 수 있는 건 나니까, 내가 있던 곳에서 나와 같이 증언했던 사람들의 다른 증언들을 믿었죠." 다시 말해 '개별적 렌즈'를 '각자 움직이게' 하고 그 추이를 기록하되, 이 복잡다단한 층위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은 자신의 렌즈였다는 것. 그는 수백 명의 증언을 일일이 카드로 만들어 자신과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을 비교해 자신과 최대한 비슷한 증언을 한 사람들의 증언을 역으로 추적했소. 이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들을 소설로 형상화 시켰소.

작가는 "5ㆍ18을 최대한 진실하게 풀어낸 것"이라 했지만, 이것은 소설이었고, "이건 개인의 것이 아니라" 했지만, 작가 임철우가 아니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오. 각각의 개별적 증언을 소설로 재현하는 자리, 이미 항상 이 외침이 겹쳐 있었으니까.

"나는 나다! 나는 작가 임철우다!"

광주=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 내 친구 박효선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하거나 이야기로 만들어지면 견뎌질 수 있다.'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말은 누군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임철우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30여년 간 5ㆍ18과 관련된 기억을 쓰고 말하면서 작가의 피해의식 역시 일종의 정형성을 띠고 있지 않을까 여겼지만, 인터뷰 내내 고통스럽게 그날을 회고하는 그를 보며 그런 의심을 접어야 했다. 광주 문화전당 앞 광장에서 30여분 달려 5ㆍ18 국립묘지에 들어섰을 때, 그는 "1980년대 그 상황이 현실이고, 지금이 현실이 아닌 것 같다"며 "사실 내 개인사 때문"이라고 했다.

"여기만 해도 내가 아는 분이 여럿 있어요. 은사도 있고, 선배도 있고. 여기 내 얘기는 없겠어요? 왜 저 양반들 저렇게 누워있고, 난 이러고 있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는 민중극단체 광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고 박효선씨와의 엇갈린 만남을 털어놓았다.

"도청에서 같이 하자고, 내 친구가 말했는데…. 하여간, 사연이 많아요. 만나러 갔는데 못 만났고…. 내가 부모님한테 마음 속으로 마지막 인사 드리고 나갔어. 그 자식 만나러 갔는데, YMCA건물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안 와. 5월 24일 한 번 그랬고, 25일 또 그랬고. 그런 맘 알아요? 이제 들어가면 나는 이제… 죽을 수도 있다…. 그러고 갔어요. 근데 안 와…."

박씨는 항쟁 마지막 날인 5월 27일 전남도청에 남아있다가 행방불명된 뒤 1년 반 만에 자수했고, 출감 이후 광주에서 5ㆍ18 관련 연극공연을 하다 1998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는 박 씨가 행방불명된 후 자수하기까지의 일을 단편 '동행'으로 썼다.

"내가 5ㆍ18 있고 나서 6개월 만에 등단했는데, 신춘문예 당선 소감을 고놈한테 썼어요. 행방불명이라고 해도 나는 네가 어디선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데 나중에 만나서 들으니, 그 친구가 그 편지를 봤다데. 그러고 <봄날> 나오고 얼마 안 돼 죽었어요. 친구가 위독하다고 했는데, 난 그날 야간 수업이 있어서 다음날 간다고 했는데…. 늦게 가서 임종도 못 했지."

작가는 <봄날> 이후 6년 만에 쓴 장편 <백년여관> 을 이 친구에게 바쳤다. 일제시대부터 근현대 100년사의 그늘을 환상적 리얼리즘 기법으로 풀어낸 이 소설에서 친구는 K로 형상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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