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중소섬유회사 A사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관세 혜택이 가장 좋다는 니트류를 만들어 수출하기 위해 생산설비도 크게 늘렸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복병이 생겼다. 바로 원산지 증명. 이 회사 임원 B씨는 "니트를 만드는 데 쓰이는 실(원사)이 수 백 가지인데 각각의 실마다 원산지가 어디인지, 어떤 비율로 섞여 있는 지 정확히 서류를 갖춰야만 관세 혜택을 받는다고 하더라"면서 "우리 같은 중소기업들이 그런 걸 어떻게 다 처리하겠나. 어설프게 했다가는 벌금을 물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러다가는 미국 수출을 접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고 걱정했다.
3일로 한미FTA가 발효(3월15일) 50일을 맞는다. 관세 인하 및 철폐를 통해 수출을 늘리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겠다는 국내 수출업체들의 장밋빛 꿈이 원산지 증명의 큰 벽에 가로 막히고 있다.
FTA는 원칙적으로 협정 당사국에서 생산된 제품에 대해 관세혜택을 준다. 원산지 증명은 수출제품이 이런 FTA상 원산지 기준을 충족했는지를 따져보는 절차. FT이 조건을 충족해야만 관세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 FTA 효과를 누리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원산지 증명 준수에 달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 제품 안에는 여러 나라에서 만든 부품과 원재료가 들어있기 때문에, 같은 제품이라도 이런 구성에 따라 원산지 증명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이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 웬만한 중소 수출기업들로선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것. 관세청 조사에 따르면 수출 기업 중 90% 가까이는 자신들이 만든 제품이 관세감면 대상인지 아닌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세청 관계자는 "완성품을 수출할 때 그 안에 들어가는 부품 전부의 원산지 증명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을 경우 수출자체가 무산되는 것은 물론 벌금 등 패널티를 받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은 중국에서 부품과 원재료를 많이 들여다 쓰는데 미국과 유럽연합(EU)은 한국산이 아닌 중국산까지 관세 혜택을 줄 수는 없다며 철저하게 검증하겠다는 입장이다. 대구섬유직물협동조합 관계자는 "섬유 관련 기업 대부분은 직원 10명도 안 되는 영세한 회사"라며 "원산지 증명의 복잡함 때문에 미국, 유럽 수출을 포기하겠다고 손을 들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현장에서 원산지 증명의 고충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예상외로 커지자 정부와 한국무역협회 등은 전담창구를 만들어 지원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정부조차 세부적인 부분까지 커버할 만큼의 전문인력이나 지원 시스템은 갖추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시욱 명지대 교수는 "원산지 증명은 FTA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그런데도 정부는 이 문제를 소홀히 한 채 지금까지 FTA 성과만 홍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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