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동차회사 포드는 1996년 멕시코에 있는 자회사로부터 자동차 부품을 수입했다. 포드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따라 원산지 증명서를 미국 세관에 내고 특혜 관세 적용을 받았다. 그러나 2001년 미국 세관은 포드가 제출한 원산지 증명서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포드 측은 "해외 수출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자료"라며 제출을 거부했고, 미국 세관은 자료 제출 거부 및 자료 보관 의무 위반을 이유로 벌금 4,100만 달러를 부과했다. 포드는 이에 불복,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2007년 이를 기각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머지 않아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다며 자유무역협정(FTA)의 최대 복병으로 원산지 증명을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이 '문을 열고 오면 관세 혜택을 주겠다'며 우리에게 복잡하게 얽힌 열쇠 꾸러미를 던져 준 것"이라며 "문을 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데, 열쇠 찾기가 만만치 않다"고 설명했다.
원산지 증명은 일단 규정자체가 복잡하다. FTA에선 체결 당사국에서 만든 부품이 일정 비율 이상 들어가야 관세혜택을 주고 있는데, 자동차만 해도 수만가지 부품의 원산지를 일일이 따지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허덕진 한국무역협회 FTA 현장지원실장은 "영세한 3,4차 협력 업체들이 '설마 우리까지 확인하겠어'하며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다가는 상위 협력 업체와 완성차 회사까지 피해를 입는다"며 "결국 아래 단계 협력 업체의 원산지 증명 자료까지도 잘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수입억원을 들여 1차 협력 업체 200여 곳에 원산지 증명 관련 시스템을 깔아 주고, 전문 컨설팅 회사로부터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도록 했다. 그룹 관계자는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협력업체를 일일이 관리하고 잘잘못을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걱정"이라고 밝혔다.
품목 분류 기준이나 특혜 관세 적용 대상이 지역마다 다른 것도 기업들을 당황하게 한다. 예를 들어, 섬유 분야의 경우, EU는 실이 아닌 직물이 어디서 만들어 졌는지를 따지는 '패부릭 포워드'인 반면 미국은 실의 원산지가 어딘지 보는 '얀 포워드'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 최근 독일에서 스마트 폰을 두고 전화 통화가 주 기능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품목분류기준을 전화기가 이니라고 주장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전화기라고 보는 등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관세 적용의 기준이 되는 HS코드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한 지방 섬유회사 관계자는 "관세사에게 얀 포워드를 기준으로 우리 제품의 HS코드를 문의했더니 경우의 수가 1,596가지라고 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유환우 대구섬유직물협동조합 상무는 "양말 하나에도 수십 가지 실을 쓰고, 대부분 회사들은 중국 등 해외에서 원재료를 가져다 쓰기 때문에 원산지 증명이 불가능하다"라며 "국내 대기업 실을 사다 쓰고 국내에 공장을 둔 몇몇 기업만 FTA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류만 상대방 국가에 보낸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다. 관세청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세금, 재무, 회계, 인사 등의 모든 데이터를 전산화하고 이를 최소 5년 동안 보관 관리해야 한다"며 "전담이라도 있어야 하지만 중소기업들이 비용을 들여가며 이를 유지하기란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FTA 규정사 미국 측은 서류 검토 후 이상이 있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한국으로 건너와 수출 관련 기업을 대상으로 현장 실사를 진행할 수 있다. 관세청 관계자는 "한-EU FTA는 EU측이 우리 세관을 통해 간접 실사를 진행하지만 미국은 직접 실사를 진행할 수 있다"며 "최고 전문가들이 총출동해 진행하는 실사라 해당 기업으로 큰 타격을 입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이 준비 없이 FTA를 너무 빠른 속도로 밀어붙인 것이 문제의 이유라고 지적한다. 이시욱 명지대 교수는 "칠레 등 그동안 FTA 체결 국가들은 관세 절차가 완벽하지 않아 원산지 증명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EU나 미국은 원산지 증명을 '무기'로 삼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정부는 우리 할 일은 끝났다며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무역협회, 관세처, 중소기업청, 각종 지방자치단체 등이 원산지 증명을 위한 상담센터를 개설했지만 관세사 몇 명을 두는 게 전부고, 정작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현장 방문 상담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교수는 "정부 부처와 관련 기관의 역략을 한데 모아 수출 기업들을 적극 도와야 한다"라며 "원산지 증명은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고 이를 소홀히 하면 FTA는 '과실'아닌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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