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한겨레신문에 쓴 고종석의 칼럼 제목은 '막말'이었다. 지난 총선 때 막말 파동이 한바탕 거세게 일어났던 일을 소재로 삼았다. '막돼먹은 말'이라는 뜻의 막말이라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단정한 말 같은데 실제로 따져보면 사람의 마음을 후비는 더 심한 막말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 악성 막말은 교양의 껍질 따위로 감춰져 있는데, 예로 든 것이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김형태 국회의원 당선자의 말이다. 고종석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다. 내 생각과도 같다.
그런데 그 글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 교묘히 숨겨진 막말의 실체를 드러낸 것은 속시원한 일이지만, 그 글 때문에 또 가려진 막말들이 있다는 말이다. 민주통합당 새누리당 가릴 것 없이 수없이 많은 막말의 사례가 있다. 특히 표적이 된 사람의 가슴을 마구 찔러 대고 마음을 후벼헤집는 말을 막말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런 말은 도처에서 발견할 정도로 일반화되어 있다. 사회를 향해 의식 있는 체 하려면 목표물인 상대를 한방에 짓이겨 놓아야 한다는 극단의 수사적 마조히즘에 빠져 있는 게 오늘의 우리 모습이 아닐까 싶다. 물론 고종석은 그 짧은 글에서 막말의 일반론을 쓰자고 한 것은 아니니, 그 부분까지 들추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단지 그 글에 이어 조금 더 나아가보려는 것일 뿐이다.
십년 전쯤이었다. 지금은 검사장이 된 점잖고 품격 있는 선배 한 사람이 말했다. "너를 두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서두를 재삼 강조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글을 쓸 때 말이다, 당하는 사람 가슴을 후벼파 듯이 하는 건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아." 무조건 나를 두고 한 말로 받아들였다. 따져보니 신통찮은 내 글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 같았다. 금방 떠오른 것은, 강금실 법무장관에게 항명한 검찰총장을 비난하는 칼럼이었다. 당사자로서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기 반성을 한다고 해도, 그다지 내가 잘못했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검찰총장으로서는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 판단으로 그의 행동은 분명히 옳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화가 났고, 그것을 글로 표현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는 통쾌한 일격으로, 누구에게는 막말로 읽혔을 것이다.
고종석의 글을 읽고, 우리 사회에 왜 이다지도 부정적 현상으로서 막말이 퍼져 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김진석은 이란 책에서 사람의 말과 내심의 괴리에 관한 문제를 다룬 바 있다. 하나의 어휘가 가지는 가치와 그 말의 사용자의 태도가 왜 다를까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며 "죽일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왜 죽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가. 국회의원이나 법관들이 서로 상대방을 부를 때 "존경하는"을 입에 달지만, 실제로는 경멸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언어적 표현에는 직설법만 있는 게 아니다. 은유를 중심으로 파생한 수많은 수사법, 심지어 과장법까지 상황에 따라서는 더 효율적이다. 내심과 언표 사이의 차이로 나타나는 그 들떠 있음이 바로 우리 사회의 역동성의 동력이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왜 내면적 가치와 무관하게 말을 사용하는가라는 성찰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과거 동양의 철학은 언행일치를 중시했다. 서당에서 교재를 종일 소리내어 달달 외우는 것은,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득하기 위해서였다. 특정 개념어를 떠올리는 순간 그것을 실천으로 바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반복 수련하는 행위를 공부로 여겼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우리는 어느새 정서적 언어 사용과 객관적 언어 사용을 달리 하는 습관을 익혔다. 말을 하더라도 상대를 공격할 때는 가급적 '독하게 나아가는' 방향을 모색한다.
내면적 진심과 표면적 언동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할 때 보통 빈말이라 한다. 실속 없는 말을 일컫는다. 층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막말도 큰 범주의 빈말에 속한다. 우리는 아마 빈말을 즐겨하는 습관 때문에 막말도 쉽게 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 한번 패한 선거전의 전세를 회복하려는 전략 구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차병직 변호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