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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칼럼] 소통사회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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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칼럼] 소통사회의 조건

입력
2012.05.0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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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소통의 천재다. 소통에 필요한 수단(부호, 기술, 장비)을 인간만큼 골고루, 그리고 풍요롭게 갖추고 있는 동물은 따로 없다. 소통 대상도 광범하다. 소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므로 소통의 제1 대상은 나의 타자, 곧 타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소통하고 자연계의 다른 존재들과도 소통하며 비인격적 사물들까지도 우리의 소통 네트워크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 소통망 속에는 신(神), 죽은 조상,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도 들어 있다. 소통은 인간의 가장 특징적인 존재방식이다. 소통을 떠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자나 깨나 소통하고 소통으로 삶을 지탱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불소통 사회라고 한다. 불소통의 문제는 근년 들어 우리 사회의 큰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다. 여기저기서 "소통해야 한다"는 소리들이 요란하다. 소통이 잘 안 되는 사회일수록 소통을 호소하는 소리도 높은 법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유례없이 찬란한 통신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고 신문, 방송, 휴대전화는 물론 인터넷,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수많은 사회매체들을 갖고 있다. 다섯 살 꼬맹이들까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닌다. 젊은층 사이에서 스마트폰은 이미 몸의 일부이다. 외부와의 접속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접속의 양과 빈도로 따지면 세계 1등이 한국이다. 한국인은 단연 '접속광'이다. 잠시라도 누가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거나 외부 접속이 끊어지면 마치 자기 존재가 이 지상에서 지워져 없어진 듯한 낭패감과 외로움에 휩싸이고, 안달하고, 그러다 분노하기까지 하는 것이 요즘의 한국인이다. 그 한국인의 나라가 지금 불소통에 시달리고 있다니 이 무슨 역설인가.

소통은 통신과 다르다. 언어 등의 메시지 교환부호가 있고 메시지를 실어 나를 기술과 장비가 있고 사용기술이 있으면 통신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런 기술과 장비만으로는 성취되지 않는 것이 소통이다. '통신 플러스 알파'가 소통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장비와 기술로 교신하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을 때 '불소통'이 발생한다. 기술과 장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 소통에 필요한 그 '알파'는 무엇인가. 아니, 그 알파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통을 방해하고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다. 불소통의 조건들을 그대로 둔 채 소통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물길도 만들지 않고 통수식부터 하자고 나서는 거나 진배 없다. 소통을 외치고 사회통합을 말하는 사람들이 먼저 손대야 할 것은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따져보고 그 조건들을 제거할 방도를 찾아나가는 일이다.

소통을 방해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들은 개인, 사회, 문화의 차원들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고서도 그 욕망만은 무한하다는 존재론적 모순의 차원에도 소통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 있다. 심리적 요인도 있다. 인간은 그 속을 알기 어려운 복잡한 동물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그 속을 더욱 복잡한 것이게 하는 변덕의 자유도 인간은 갖고 있다. 이런 불소통의 요인들 중에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함께 안고 가야 하는 것도 있고 인간이 제 힘으로 제거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우리가 먼저 주목할 것은 이 두 번째 범주의 요인, 곧 우리가 고치자면 고칠 수 있고 제거하자면 제거할 수도 있는 요인이다.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차원'의 요인이 그런 요인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야 하는 사회, 그리고 그 억울함을 하소연 할 길도 풀길도 막막한 사회에서는 소통이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진실이다. 억울한 일, 부당한 일, 불의한 일을 당하고도 어쩔 도리가 없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순서를 매기면 그럴 때 사람들은 1) 운다, 2) 미친다, 3) 죽는다, 4) 사회파괴에 나선다. 이 네 가지 행동방식의 어느 것도 소통과 관계없다. 거기에는 소통은커녕 고통이 있고 소통을 막는 슬픔, 분노, 증오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소통하자"고 외치는 일이 아니다. 함부로 화해와 통합을 말하거나 무턱대고 용서와 관용을 호소할 일도 아니다. 그런 말만으로는 소통도, 화해도, 통합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고통을 발생시키는 요인들을 제거해서 사람들의 가슴에 담긴 상처의 무게를 들어줄 사회적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그 조건의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정의'다. 공정성, 합리성, 평등은 공존공생의 사회정의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공생사회에서만 소통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생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일, 그것이 소통사회의 조건이다. 이것은 설교로, 도덕교과서로, 구호로 될 일이 아니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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