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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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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22>

입력
2012.04.3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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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작대기로 마루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앞서 나간 사람들이 쓰러지는 게 보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그것이 기관포라는데 우리도 남도의 어느 군영에서 빼앗아 가진 적이 있다더군요. 손잡이를 돌리면 여러 개의 총구가 빙빙 돌면서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 나온다니 화승총에 비하면 거의 수천 사람의 몫을 해내는 거랍니다. 이전에 우리 편에서는 탄환이 없어서 쓰지도 못하고 그냥 버려두었답니다. 두번째 접전에서 만여 명의 병력은 삼천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그게 아마 정오가 지나서 미시 무렵이었을 겁니다. 빗발치는 총탄을 피하여 고개 아래로 쫓겨 내려오니 살아남은 사람들도 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는 사격이 멈춘 틈을 타서 다시 비탈을 올라가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다니다가 용케 이 서방을 찾아냈습니다. 그를 일으켜서 옆구리에 끼고 내려왔지요.

마지막 싸움은 아마 신시 무렵이었을 텐데 짧은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이었거든요. 도인들은 행수나 대두나 병졸이나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죽은 사람들의 목숨 값을 위해서라도 우금치 고개를 점령해야 되겠다는 결심이었겠지요. 눈에 핏발이 곤두서서 누구 하나 그만두자는 이가 없었습니다. 일단 고개 중턱에까지 달려가서 저들의 진지 가까이까지 기어오르기로 했던 모양입디다. 저는 이 서방과 함께 다른 부상자들과 본진에 남아 있었습니다. 벼락 치는 것 같은 화승총의 엄청나게 큰 총성과 함께 와아, 하는 함성이 들리면서 농민군이 일제히 적진을 덮치는 게 보였는데, 다시 그 기관포 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왔습니다. 탄환의 불똥이 보여서 좌우에 포가 두 대라는 걸 알게 되었죠. 따다다 따다다 하는 소리가 끝없이 들려왔는데 올려다보니 모두 죽었는지 엎드렸는지 일어선 이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탈의 곳곳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몸을 돌려 아래로 달려 내려오기 시작하자 고갯마루에 엎드려 사격하던 관군과 일본군들이 총을 쏘면서 뒤를 쫓았지요. 그들은 거의 다 넘어지거나 구르거나 하면서 쓰러지더군요.

남은 사람들은 사방에 어둠이 깔린 골짜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뺐는데 널 고개를 넘고 경천 역 거쳐서 노성에 이르렀을 때에는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중군을 이루었던 호남 농민군은 모두 무너져서 만여 명 중에 겨우 오백여 명이 살아남았다고 합디다. 이인 방면에서 공주 감영의 서쪽을 쳤던 호서 농민군도 크게 패하여 노성에서 우리와 합대하고 논산 거쳐서 금산 방향으로 빠졌으니 아마도 지금쯤은 우리처럼 해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마침 노성 인근 마을에서 지게를 얻어 이 서방을 짊어지고 밤새 걸어왔습니다. 이제 관군의 대토벌이 시작될 터인즉 그것이 가장 두렵고 아마도 각처에서 떼주검이 나올 것입니다.

나는 집안 식구들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고 특히 장쇠와 안 서방에게는 틈틈이 장터에 나가 소문을 들어보라고 일렀다. 아무래도 의원의 입이 염려되어 장쇠가 약 받으러 갈 일이지만 내가 나섰다. 장터는 아직 어중간한 무싯날이라 한산했고 약방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의원은 아이와 더불어 마른 약초를 작두질하고 앉았다가 나를 맞았다.

좀 어떻소, 아직도 인사불성인가?

처음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온종일 자고 있어요.

푹 쉬어야 해. 한 열흘 누워 앓으면 상처가 아물 거요.

나는 그에게 은근히 당부했다.

제 친척 오라비인데, 호서 감영에 다니러 갔다가 난군의 총에 맞았답니다. 소문나서 좋을 것 없으니 부탁드립니다.

어허 무슨 소리, 그저 난세에는 입조심을 해야지.

상처 때문인지 처음 며칠 동안 그는 밤마다 고열과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루더니, 열흘쯤 지나면서부터 일어나 앉아 밥상도 받고 잘 걷지는 못하여도 벽을 짚고 이동을 할 정도가 되었다. 나는 옆에 붙어 앉아 고약을 갈아 붙이고 약도 달여 먹였으며, 의원의 말대로 한 달쯤이면 전처럼 건강하게 나다닐 수 있겠다고 안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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