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검역중단을 놓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시민단체들은 물론 여야 정치권까지 국민건강 보호를 위해 ‘선 검역중단, 후 조치’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단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이 확보돼 있는 만큼 검역중단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비판적 여론이 확산돼 갈수록 수세에 몰리는 분위기다.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개봉검사 비율을 기존 3% 수준에서 50%로 대폭 높여 검역을 강화한 것은 나름 의미 있는 조치라는 입장이다. 농림수산검역검사본부 관계자는 “통상 3% 수준인 개봉검사 비율을 50%로 끌어올린 것은 사실상 검역중단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검역중단을 해도 괜찮을 듯 한데, 왜 망설이는 걸까.
정부는 당장 검역중단 조치를 취하기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견된 광우병 젖소가 인체에 위험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국내 수입되지 않는 젖소인데다 월령이 광우병에 잘 걸리지 않는 10년7개월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식품안전 규제가 까다로운 일본과 캐나다 등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않는 상황에서 우리만 나서면 대외 신인도가 떨어지는 부담이 있다는 설명이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광우병에 걸린 젖소가 즉시 격리 조치돼 식품 체인으로 유입되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우리 국민 건강에 위험을 미친다고 판단하기도 어렵다”며 “이런 상황에서 검역중단 조치를 내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밝히 더 결정적인 이유는 검역중단에 들어갈 경우 한미 간 통상마찰 가능성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2003년 캐나다에서 광우병이 발생했을 때 쇠고기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가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에서 패소하기 직전 양자 간 합의를 했던 경험이 있다. 캐나다는 2007년 국제수역사무국(OIE) 광우병위험통제국 지위를 회복한 뒤 수입재개 협상을 요청했다. 양국 간 협의가 진행되던 중 캐나다에서 광우병이 또 발생해 수입재개가 지연되자, 캐나다는 2009년 4월 우리나라를 WTO에 제소했다. 우리 정부는 광우병이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과학적 근거를 갖고 분쟁 절차를 진행했으나 패소가 짙어지자 작년 6월 특정위험물질(SRM)을 제거한 30개월령 미만의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WTO 제소에 따른 통상마찰은 패소 자체도 문제지만, WTO 규정과 어긋나는 국내 조항들을 모두 없애야 하는 후속조치가 더 무섭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다. 예컨대 국내 조항들을 그래도 방치할 경우 상대국에서 자동차 등 특정 품목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기존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보다 더 불리한 조건으로 쇠고기를 수입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쇠고기 수출국들이 우리나라 검역시스템을 믿지 못하겠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면 연쇄적인 분쟁에 휘말릴 우려도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광우병 사태가 정치 쟁점화하는 것이다. 정부는 검역중단 조치를 취할 경우 시민단체와 야권에서 수입위생조건 재협상과 수입중단이라는 한층 강화된 정치적 요구를 이어가면서 최종적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정부 내부에선 식품안전과 관련된 쇠고기 문제가 정치문제화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면서 “검역중단 조치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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