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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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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18>

입력
2012.04.2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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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돌이 이신통에 대한 불길한 소식을 남기고 떠난 뒤에 나는 뜸을 들였다가 어느 날 영업이 끝나고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잠을 청하던 때에 슬며시 묻게 되었다.

엄마, 천지도가 뭔지 알우?

자다가 봉창 두들긴다더니, 뜬금없이 천지도는 왜…… 한번 믿어볼라구?

관에서 금한다며?

양반 것들이 저희 자리 내노랄까봐 노심초사하는 게지. 천지도에서 사람은 누구나 하늘이다 그런다는구나. 그 말본새 하난 마음에 들더만. 나두 주문 외우는 소린 여러 번 들었다. 우리 집에 묵어가는 길손들 중에 겉으로 말은 안 해두 내가 대강 눈치를 채는데 하나둘이 아녀. 천지도인들 점잖은 사람들이더라. 소문에 듣자 허니 촌에는 동네마다 모여서 기도하구 그런다대.

하면 엄마는 왜 안 믿었어?

봄꽃두 먼저 피면 반갑고 이쁘기는 하더라만 그것이 천기를 보는 거여. 꽃샘바람 불고 눈보라치면 속절없이 지는 법이니라. 세상이 만화방창할 제 더불어 피어나야 절기를 누리는 거란다.

그러면 어여쁜 본색을 어찌 드러낼 수 있남?

글쎄, 남이 한다고 성급히 따라할 것이 아니다. 작은 복은 제 복이려니 하고 살아야지, 언제 하늘 복까지 바라겠냐.

나는 어쩐지 엄마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산전수전 다 겪어온 우리 모녀의 지혜이기도 하고, 열없는 쓸쓸함이기도 하리라.

그해 세밑이 가까웠는데 어쩐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공연히 불안했고, 부엌으로 가다가 우물로 가고, 뒷간에 간다며 대문 밖에 나가보기도 하였다. 공연히 봉노에 나가는 교자상을 맞들어주다가 삐끗하여 국사발을 모조리 깻박치기도 했다. 오후부터 첫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날씨는 별로 춥지 않아서 내리자마자 녹아버리곤 하여 들어오는 손님마다 미투리에 진흙이 떡처럼 엉겨붙었다. 안 서방이 신발을 털도록 섬돌 아래 가마니 몇 장을 깔아두었을 정도였다. 엄마는 이런 날 길손이 줄어든다는 걸 알고 있어서 몇 번이나 대문 쪽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는 거였다.

에이 날씨두 지랄 맞네!

어느 손님이 대문간으로 들어서며 그 소리를 들었던지 맞받았다.

날씨두 제 욕하면 더 사나워진다오.

그는 두루마기 차림에 행전 친 모습이었는데 삿갓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찬방 앞 툇마루에 앉았고 나는 찬방에서 누가 오려나, 하고 미닫이창을 열고 내다보던 중이었다. 그가 삿갓을 벗고 다가오면서 말을 건넸다.

구례 댁 평안하시우?

애고머니, 이게 얼마 만인가?

나는 한눈에 이신통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래서는 창가에서 얼른 주저앉아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엄마와 그가 주고받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어째 혼자 다니는가?

예, 이 집에서 만나자고 한 사람들이 있으니 내일이나 모레나 여럿이 올 겁니다.

그럼 이 서방은 뒤채로 가소. 거기가 오붓하고 조용하니까.

하고는 엄마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찬방을 넘겨다보며 말했다.

연옥아 손님 안내해드려라.

나는 고갯짓과 찌푸린 얼굴로 항의했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촉했다.

얘가 망부석이 될 모양이더니 이제 한시름 놓았네. 어서 일어서라니까!

나는 뻗댈 수가 없어서 방을 나와 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는 당황했는지 마주 꾸벅하고는 비켜섰고 나는 앞서서 뒤채로 걸어갔다. 뒤채의 윗방으로 그를 안내했는데 그곳이 점잖은 내외가 함께 드는 조용한 방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따뜻한 물을 항아리에 담아다 놋대야와 함께 툇마루에 놓으며 늘 하던 것처럼 말했다.

버선은 젖었을 터이니 벗어서 내주시지요.

그는 겨우 알아들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고맙소, 라고 어쩐지 수줍게 중얼거리면서 버선을 벗어서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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