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로 같은 성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제는 어린아이 소리 들어본 지 오래인
여남은 가구 남은 집성촌 마을회관 어귀
낡은 흑백사진에서나 본 듯한
간판 없는 구멍가게에 들렀네
낯선 힘에 저항하는 미닫이문을
우격다짐하여 열고 들어선 가게
먼지 자욱한 엉성한 진열품 너머 회벽에 걸린 낡은 흑판
동네 사람들 살림살이 고스란히 담고 있네
삐뚤빼뚤 엉성한 글씨로 쓴 외상 장부
곽병호……
곽효환/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
…… 목장갑 네 켤레
발음하기도 쓰기도 어려운
깨알 같은 글씨 가득한 한 뼘들이 전화번호부에도 인명록에도
꼭 하나뿐이던 내 이름.
수십 가구 작은 마을에
연탄 두 장 막걸리 세 병으로 존재하네
그것이 허세 없는 내 이름값이려니
어린 시절 골목어귀 구멍가게의 회색노트에는 제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진은영이네/소주2, 두부1모. 할머니가 심부름은 항상 제게 시키셨거든요. 외상장부에 적힌 이름은 그 집 장남이나 장녀 아이의 이름. 아니면 고등학교에서 늦게 귀가하는 형님·누나들 말고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막내의 이름. 어른이 되어서는 외상을 해 본 적이 없네요. 아니 매일 하는군요. 오늘도 신용카드를 그었으니. 가게 아주머니는 "얘야, 느그네 외상값 만 500원이여, 소주 외상은 더는 안 된다고 혀" 하시면서도 두부니 국수니 급한 건 외상으로 선뜻 주셨는데. 이런 고마운 잔소리에 파산할 걱정은 없었는데. 요즘 외상장부는 잔소리도 별로 없다가 이자까지 무섭게 챙겨서, 고통 받는 신용불량자가 벌써 100만이라네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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