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주시리라.’(시편 37장 5절)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가톨릭교회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농아(聾啞) 사제’, 박민서(44) 신부가 매일 빼먹지 않고 되새기는 성경 구절이다. 5년 전 정진석 추기경이 가톨릭 서울대교구장 직권으로 220여년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청각ㆍ언어 장애인인 그에게 사제 서품을 허락했다. 농아 신부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14명뿐이다.
장애인의 날(20일)을 하루 앞둔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에서 박 신부를 만나 수화통역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박 신부는 매주 일ㆍ수ㆍ목요일 사흘간 농아선교회에서 200여명의 청각 장애인 신자들을 위해 수화로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박 신부의 인생은 한편의 영화 같다. 그는 두 살 때 홍역을 앓던 중 약물 부작용으로 청력뿐 아니라 말까지 잃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아들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중학교까지 일반학교를 다니며 급우들의 조롱과 따돌림을 견뎌야 했다. 일반 고등학교에 합격했지만 장애인이란 이유로 입학이 거부되는 바람에 1984년 국립서울농학교에 들어갔다. 박 신부는 오히려 기뻤다고 했다. “어머니는 농아학교에 들어갔다고 펑펑 우시는데, 지난 세월이 너무 힘들었던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지요.”
뒤늦게 아들의 장애를 받아들인 부모님은 운보 김기창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길 바라며 그를 미술학원에 보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역시 청각ㆍ언어 장애인인 미술학원 원장의 권유로 가톨릭 신자가 되고, 평생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살겠노라 결심했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신부가 되리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신부의 자격요건에 ‘정신적ㆍ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는 규정이 있어서다. 경원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만화영화 배경을 그리는 회사에 다니던 그는 1990년 주일학교에서 정순오 신부(현 한강성당 주임신부 겸 서울가톨릭 농아선교회 담당사제)를 만나면서 사제의 꿈을 키웠다. 청각장애 부모 밑에서 자라 누구보다 그의 사정을 잘 이해했던 정 신부는 미국 최초의 청각 장애인 사제 토머스 콜린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박 신부를 부탁했다. 1994년 미국으로 유학간 박 신부는 청각장애인종합대학 갈로뎃대를 졸업하고, 뉴욕 성요한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렇게 10년 간 유학생활을 마치고 2004년 귀국해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에서 2년 6개월간 더 공부를 한 뒤 2007년 7월 마침내 사제서품을 받았다.
박 신부는 줄곧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하고 있다. 그에게 요즘 새로운 소망이 생겼다. 청각 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번듯한 성당을 건립하는 일이다. 농아선교회가 빌려서 쓰고 있는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서울수련원은 최대 수용인원이 80명 정도인데, 박 신부가 수화미사를 집전하면서 신자가 200여명으로 늘어나 대부분 앉지 못하고 선 채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서울은 물론이고 파주와 동두천, 안산, 천안 등지의 청각장애인 신자까지 수화미사에 함께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
문제는 성당 건립 기금이다. 청각 장애인 신자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저소득층이라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박 신부는 서울 시내 여러 성당을 돌며 후원미사를 드리고, 나눔 바자와 일일 호프를 여는 등 모금에 힘쓰고 있다. 22일에는 수유동 서울가톨릭농아선교회에서 바자를 연다.
박 신부는 “첫 청각 장애인 신부로서 고충도 많지만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오는 신자들을 보면 힘이 난다. 많은 이들이 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장애인들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글ㆍ사진=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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