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후 5시30분쯤 경기 일산경찰서 형사과장실에 앳된 얼굴의 남녀가 나타났다. 부모와 변호사까지 동행한 이모(18)군 남매였다. 이들은 형사과장에게 "사람을 죽여서 묻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이들의 말이 실제상황이라고 판단한 형사과장은 전 형사들을 비상 소집했다. 이들이 털어놓은 살인 사건의 가담자가 모두 9명이나 됐기 때문이다.
같은 날 밤 11시, 형사들은 이군 남매의 진술을 토대로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한 공원을 수색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끼어 있는 공원은 언덕 형태로 산책로가 있었다. 옆에 아파트단지가 있어 많은 주민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경찰이 산책로 나무 아래 낙엽을 치우자 최근 땅을 판 듯한 흔적이 나타났다. 흙을 뒤집자 20㎝ 아래서 청테이프로 팔다리가 묶인 A(17)양의 시신이 드러났다. 부패하기 시작한 시신의 온 몸에는 피멍이 가득했고, 입 안은 폭행으로 완전히 헐어 있었다.
10대 남녀 9명이 친구를 마구 폭행, 살해한 뒤 암매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 중 4명은 남매지간이고, 고등학교 과정 재학생도 3명이나 포함돼 있다.
일산경찰서는 18일 자수한 이군 남매를 비롯해 주범 구모(17ㆍ전과6범)군과 구군의 누나(19) 등 피의자 9명을 폭행치사 및 사체유기 혐의로 검거, 조사 중이다. 피의자들은 가출한 뒤 함께 어울린 사이로 남자 4명과 여자 5명, 나이는 17~19세이고, 구군 등 3명은 고양시내 한 실업고 2학년에 재학 중이다.
경찰에 따르면 구군 등은 지난 5일 오후 3시쯤 행신동 한 다세대주택 지하 이모(18)양의 자취방에서 야구방망이 등으로 A양을 집단 폭행해 숨지게 한 뒤 7일 오전 2~3시쯤 공원에 암매장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숨진 A양은 경기 파주시의 모 고교를 1학년 때 자퇴했고 두 차례 가출한 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조사결과 구군 등은 사건 당일 A양을 "뒷말을 하고 건방지다"는 이유로 수 시간 동안 번갈아가며 폭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다세대주택 지하에는 4가구가 더 살았지만 이웃들은 "당시 별다른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폭행을 당한 A양이 6일 오전 2시쯤 화장실에서 나오며 쓰러지자 구군 등은 A양을 큰 방으로 옮겨 재웠다. 하지만 얼마 뒤 A양은 코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다. 이들은 A양을 암매장해 범행사실을 은폐하기로 하고 시신을 서랍장 안에 넣은 뒤, 인적이 드문 새벽시간에 이양의 자취방에서 300여m 떨어진 공원으로 옮긴 뒤 파묻었다. 자취방에 있던 프라이팬과 망치 등으로 땅을 팠다.
이들의 범행은 이군 남매가 죄책감에 며칠을 고민하다 부모에게 털어놓으면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이들이 A양을 때린 뒤 같이 잠을 잔 점 등으로 미뤄 계획적인 살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은 구군 등 범행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5명에 대해 이날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가담 정도가 경미한 것으로 드러난 4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고양=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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