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 구유고국제형사재판소(ICTY) 법정. 양복을 말쑥하게 입은 피고인 보이슬라브 세셀리(58)가 재판장에게 훈계조의 설교를 늘어 놓는다.
“시민이여, 무기를 들라. 부대를 결성하라. 더러운 피가 우리 밭을 적시도록.” “당신(재판장), 이 가사 알 거야. 이건 프랑스 국가(國歌)란 말이지.”
세셀리는 공판 때마다 재판부에 엉뚱한 요구를 하거나 쓸데 없는 얘기를 해서 재판을 망쳐 놓기로 악명 높다. 그러나 재판부가 그의 발언을 막는 건 쉽지 않다. 유고 내전에서 저지른 반인륜 범죄 혐의로 기소된 세르비아 정치인인 그는 변호사 없이 스스로를 변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셀리의 입을 막는 건 피고인의 방어권을 원천 봉쇄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16일 뉴욕타임스는 악명 높은 전범들을 심판하는 국제재판소가 피고인들의 재판 방해와 고의 지연전술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 전범 세셀리는 법정 안에서 재판 관계자들을 모욕하거나 그의 정적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등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여 왔다. 재판과 관계 없는 얘기로 사흘에 걸쳐 10시간 동안 변론하기도 했다.
그의 비상식적 행동은 이 뿐만이 아니다. 변호인 자격으로 얻은 기밀 재판문서와 비공개 증인 이름을 외부에 알리는 바람에 검사 측은 추가 증인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4주 동안 옥중 단식투쟁도 벌였다. 그의 재판방해 행위 때문에 공판이 시작된 지 5년째지만, 언제 단죄(판결)가 내려질 지는 미지수다.
이런 지연전술은 ICTY 법정의 전범들이 상습적으로 써 먹는 수법이다. 인종청소를 주도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은 건강 문제와 변호인 선임 등을 이유로 재판을 질질 끌다가 2006년 판결도 받기 전 감옥에서 자연사했다. ‘발칸의 도살자’라 불리던 라도반 카라지치는 범죄혐의가 적힌 공소장을 다 읽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재판 진행을 거부한 바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의 구현’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피고인이 변호인을 겸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국제재판소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인권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제프리 로버트슨 변호사는 “복잡한 전범 재판의 경우 영미법 체계보다는 피고인 협조가 필요 없는 대륙법 체계가 어울린다”며 “대륙법 체계 적용시 재판장 권한이 커져 비협조적 피고인의 권리가 제한된다”고 말했다.
전범들이지만 피고인의 권리를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반론도 있다. 네덜란드의 국제법 교수인 고란 슬루이터는 “진행을 어떻게 하는지는 재판장에게 달려 있고, 일부 재판장은 잘 대처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그러나 피고인이 스스로를 변호하는 걸 제한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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