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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분향소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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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분향소에 가자

입력
2012.04.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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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동창의 빙모상에 가서 그간 소원했던 친구와 수다를 떨고 서로의 삶도 격려했다. 또 며칠 전 동료 선생님의 모친상에 가서는 비록 짧았지만 학교에서 나누지 못한 대화를 가졌다. 장례식장에 온 친척 할머니를 느린 걸음으로 부축하며 오래 배웅하는 선생님의 뒷모습도 애틋했다. 밀란 쿤데라는 에서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고 했는데 바람직한 장례가 그런 것이지 싶다. 망자가 떠난 슬픔의 자리에 산 자들이 모여 행복한 유대를 나누는 장례 말이다.

너무 일찍 삶을 등진 사람의 장례, 죽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 죽은 이의 장례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때에도 산 자들은 최선을 다해 떠난 이의 텅 빈 공간을 행복으로 채우려 한다. 추억과 위로, 한탄과 토로가 오간다. 어쩌랴. 산 자는 살아야 하지 않는가. 이때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다. 망자가 남긴 빈 터에서 다시 새롭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 때문에 죽음에 대한 존중과 삶에 대한 존중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죽음이 소멸의 무덤이 아니라 생성의 터전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죽음 이후 새 삶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도저히 통하지 않고, 심지어 허락되지 않을 때도 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끊이지 않는 죽음, 끝없는 장례가 그러하다. 얼마 전 또 한 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자살했다. 올해에만 벌써 세 번째 죽음이다. 2009년 쌍용차가 대량 정리해고를 단행한 이후 스물 두 명의 노동자가 자살과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삶을 마감했다. 어찌 이들의 죽음을 우연이라 할 수 있는가. 그 누가 의지박약 운운하며 해고노동자들을 탓할 수 있는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찌해야 하는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본래 뿌리 내린 땅에서 강제로 뽑혀 사막에 내던져진 나무와 같다. 정부와 기업은 정리해고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을 헬기와 컨테이너로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지키지도 않을 허울뿐인 해고자 지원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성장과 개발 논리로 '삶의 광범위한 사막화'를 촉진하는 주범이다. 또한 시민들은 쓰러져 말라가는 나무들 곁을 무관심하게 지나치거나 "이 나무는 왜 이리 시들해? 왜 뿌리를 못 내려?" 한두 마디 던질 뿐이다. 지난 선거 때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처한 문제를 알리고 해결을 촉구한 정당은 진보신당 뿐이었다. 진보신당은 득표율이 1%였다.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죽음은 사회적 배제와 무관심이 야기한 사회적 타살임이 명백하다. 이 강요된 죽음의 연쇄를 중단키 위해 해고노동자 당사자들과 시민들이 나섰다. 이들은 대한문 앞에 고인을 위한 분향소를 차렸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도로교통법 위반이라며 분향물품을 철거하고 조문 행사를 훼방 놓았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연행됐고 이 과정에서 실신자도 발생했다. 한번은 상주를 맡은 고인의 동료 노동자가 경찰과의 몸싸움 과정에서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 그러자 또 다른 동료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가 벗어 놓은 상복을 걸치고 새로운 상주가 되어 조문객을 받았다. 조문 후 인사를 나눌 때,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한껏 충혈된 그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날 이후 그 눈동자가 자꾸만 떠오른다.

경찰이 불법으로 규정한 대한문 앞 분향소를 송경동 시인은 '사회적 분향소'라고 칭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사회적 타살의 피해자에 대한 추모는 사회적 분향의 형식을 갖춰야 한다. 빈소는 거리이고 조문객은 시민이고 상주는 해고노동자다. 아니 이 비정한 사회에서 해고노동자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하는 이는 누구나 상주일 수 있다. 사회적 냉대와 고립 때문에 죽음에 이른 망자들의 장례가 너무 잦을 때, 그 같은 죽음의 연쇄를 삶의 연쇄로 바꾸기 위해서는, 슬픔이란 형식을 기어이 행복이란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은 부족하다. 그러니 대한문 앞 분향소, 그곳에 가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가야 한다.

심보선 시인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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