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명의 학생과 1명의 교수가 잇달아 자살해 큰 충격을 던졌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ㆍ카이스트)에서 또 1명의 학생이 학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카이스트 측은 지난해와 같은 악몽이 재현될까 우려하며 긴급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서남표 총장이 지난해 자살 사태 이후 내놓은 학내 제도 개선안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17일 오전 5시40분쯤 대전 유성구 구성동 카이스트 교내에서 이 학교 전산학과 4학년 김모(23)군이 기숙사 앞 잔디밭에 쓰러져 있는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발견, 119에 신고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경찰은 김군이 이날 오전 4시35분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 내리는 것이 CCTV에 찍혀 있는 점으로 미뤄 투신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에서 과학고를 나와 2007년 카이스트에 입학한 김군은 2010년 군복무를 위해 휴학했다 올해 2월 복학했으며 평소 학교 성적도 우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결과 김군은 룸메이트와 가족에게 메모 형식의 유서를 남겼다. 유서에는 '미안하다. 먼저 간다' '열정이 사라졌다. 정체된 느낌이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주변 학생들은 "김군이 장래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말했다.
또 다시 학생 자살 사건이 일어나자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과 보직교수들은 긴급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서 총장은 "학교의 책임자로서 가슴아픈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유가족에게 죄송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학교 측은 교학부총장, 학생지원본부장과 학부 및 대학원 총학생회장 등 8명으로 비상대책팀을 구성하고 그 동안의 개혁정책을 재점검하는 한편 재발 방지 대책 마련에 나섰다.
카이스트에서는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전문계고 출신의 로봇영재 조모(19)군 등 4명의 재학생과 휴학생이 학업 부담 등을 이기지 못하고 잇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생명과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으로 인정받던 교수까지 자살하며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카이스트는 학생 자살 사태를 막기 위해 보직교수와 평교수, 학생대표들로 혁신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학점에 따른 징벌적 성격의 수업료 차등 징수제 폐지, 전과목 영어강의 완화 등 이른바 '서남표식' 경쟁 위주 교육을 완화하는 내용의 제도 개선안을 마련했다. 또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챙기기 위해 정신과 전문의를 채용하고 전체 학생을 상대로 정신건강 검진을 실시하는 한편 24시간 상담시스템 구축, 교수와 학생 간 대화시간 등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들 제도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는 시큰둥하다. 올해 초 실시된 학생심리검사에는 학부재학생의 25% 정도인 1,000여명만 참여했을 뿐이다. 한 학생은"학교측의 제도 개선으로 일부 부담이 완화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학업의 기본적인 양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생들이 짓눌리는 분위기는 여전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학교 개혁 방향 등을 놓고 서 총장과 교수협회가 대립하면서 고소ㆍ고발 사태로까지 비화하는 등 어수선한 상황도 학내 분위기 침체를 부추기고 있다. 혁신비대위원장을 지낸 경종민 교수협회장은 "제도 개선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학생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며 "학생들의 고민을 껴안아 줄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전=허택회기자 thhe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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