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에 직장이 있는 회사원 백승문(35)씨. 서울 송파구 성내동의 전세 아파트(전용 85㎡)에 살던 그는 올해 초 경기 하남의 같은 규모 전세 아파트로 옮겼다. 집주인이 2억7,000만원이던 전세보증금을 3억5,000만원으로 한꺼번에 8,000만원이나 올리는 바람에 ‘탈(脫)서울’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백씨는 “전세금을 올려주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도 생활비가 쪼들리는 상황에서 원리금을 갚아나갈 자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전세 아파트(전용 94㎡)에 사는 자영업자 황문석(54)씨는 임박한 재계약을 놓고 고민 중이다. 주인이 전세보증금 6,000만원을 올려달라고 통보해왔지만, 도무지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주변의 소형 아파트로 옮기든지, 아니면 부천지역의 같은 면적대 빌라나 연립으로 이사할 생각이다. 황씨는 “불경기라 장사도 안 되는데 6,000만원이라는 큰 돈을 무슨 수로 마련할 수 있겠느냐”며 “우리 같은 서민은 전세난이 닥칠 때마다 집을 줄이든지, 아니면 외곽으로 빠지는 방법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는 최근 보금자리주택 등 다양한 정책 추진으로 아파트 전세시장이 안정 국면으로 전환됐다고 밝혔지만, 실은 전셋값을 감당하기 힘든 서민들이 주거여건이 더 열악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아파트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아파트에서 연립이나 빌라로,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전세를 옮겨가는 주거 하향 이동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통계에서도 아파트 전세난이 주춤해진 반면, 단독주택이나 빌라ㆍ연립의 전세가격은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수천만원에서 1억원 이상씩 급등한 아파트 전셋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기존 보증금 수준에서 찾을 수 있는 집을 고르다 보니 도심에서 멀어지고 주거 환경도 열악해지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16일 부동산 리서치업체 리얼투데이가 국민은행 ‘주택가격동향조사’를 바탕으로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서울 아파트 전세가격은 0.4% 오르는데 그쳤다. 반면 단독과 연립은 각각 0.6%, 1.0%씩 올랐다. 양지영 팀장은 “최근 몇 년간 무섭게 치솟은 아파트 전셋값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수요자들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단독주택이나 연립으로 갈아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세 거래량도 아파트는 주춤해진 반면, 단독과 연립은 크게 늘고 있다. 아파트 전세 거래량(실거래 신고 기준)은 올해 1월 6,800건에서 2월 1만3,259건, 3월 1만657건으로 조사됐다. 전세 수요가 많은 3월 봄 이사철에 오히려 전세 거래량이 줄어든 것은 이례적이다. 그런데 단독과 연립 전세 거래량은 1월 5,581건에서 2월 9,210건, 3월 1만963건으로 급증세다. 특히 3월과 4월(첫째 주)에는 아파트 전세 거래량을 추월했다. 국토해양부 자료를 봐도 2월 서울의 전세 거래량은 5.3%(전년동월비) 증가한 반면, 경기지역은 2배 이상 많은 12.2%나 늘어났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서 전세물량을 주로 취급하는 M공인 관계자는 “최근 아파트에 살다가 빌라나 연립으로 옮겨가는 건수가 전체 전세 계약의 10%를 넘는다”며 “전세 수요가 다양한 유형의 주택으로 분산되면서 오르기만 하던 아파트 전셋값도 한풀 꺾였다”고 전했다.
그렇다고 전세난이 완전히 해소 국면에 접어든 것으로 보긴 어렵다. 작년에 비해 줄어드는 올해 아파트 입주 물량은 여전히 복병이다. 서울 등 인기지역 아파트에 대한 잠재 임대수요가 두터운데다, 3~4인 가구에서 1~2인 가구로 세대 분할이 빨라지고 있는 만큼 지속적인 입주 물량이 뒷받침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 전세난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올해 아파트 입주 물량은 약 16만 가구로, 2010년 25만9,000가구, 지난해 20만6,000가구에 이어 3년 연속 감소세를 보일 전망이다.
김선덕 건설산업전략연구소장은 “임대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몇 년간 원룸이나 도시형생활주택의 공급이 늘었지만, 이는 대부분 월세 수요를 흡수하는 주택들”이라며 “전세 수요를 충족할만한 아파트가 꾸준히 공급되지 않으면 전세시장의 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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