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지도부 교체를 앞둔 중국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다. 차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하던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서기가 돌연 낙마한 데 이어 그의 사법처리 여부를 놓고 정파간 입장이 크게 엇갈리며 혼란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공안국장이 2월 6일 청두(成都)의 미국 영사관에서 하루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표면화했다. 이후 국가안전부가 왕 전 국장을 빼내 베이징(北京)으로 연행했으며 보 전 서기는 전면 조사를 받은 뒤 3월 15일 충칭시 서기에서 전격 해임됐다. 보 서기는 최근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직도 정지됐다.
왕 전 국장이 미 영사관으로 들어간 것은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의 죽음에서 촉발됐다. 헤이우드는 1990년대 보 전 서기가 다롄(大連) 시장으로 있을 때 보 전 서기 가족들과 알게 됐다. 헤이우드는 이후 보 전 서기의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영국 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보 전 서기 집안과 가까이 지냈다.
그러던 헤이우드가 지난해 11월 15일 충칭시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왕 전 국장은 당시 이 사건을 조사했다. 왕 전 국장은 보 전 서기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가 헤이우드의 죽음에 개입한 사실을 확인한 뒤 보 전 서기에게 보고했다가 도리어 해임되자 미국 영사관의 문을 두드린 것으로 짐작된다.
로이터통신은 16일 헤이우드가 구카이라이의 재산 도피 계획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다 살해됐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구카이라이가 지난해 말 거액의 뭉칫돈을 해외로 빼돌리기 위해 도움을 청하자 헤이우드가 대가를 요구하며 재산 도피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구카이라이는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의 존재가 드러나면 남편까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고 보고 독살 계획을 세웠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구카이라이와 헤이우드가 연인이라는 설까지 돌았으나 로이터통신은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정치인 가족의 단순 부패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권력 투쟁 지형상 그렇게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보 전 서기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상하이방(上海幇)과 태자당(太子黨ㆍ당정군의 고위관료 집안 출신) 연합세력의 선두주자라는 점에서다. 최고 지도자에 오른 후에도 상하이방과 태자당 연합세력의 견제를 받아온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2006년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불리던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를 친 데 이어 이번에 보 전 서기를 작심하고 공격했다는 게 베이징(北京) 외교가의 시각이다.
특히 후 주석이 지휘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가 보 전 서기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청두(成都)군구(軍區) 사령부를 직접 수사하고 나서면서 사건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최근엔 장 전 주석의 심복 저우융캉(周永康) 중앙정법위 서기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이란 소문까지 확산되고 있다. 서열 9위의 저우 상무위원은 지난달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충칭의 성과를 치하하며 보 전 서기를 공개 지지한 바 있다. 저우 상무위원이 무장경찰과 공안을 지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궁지에 몰릴 경우 어떻게 행동할지 주목된다.
사실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의 집단지도체제로 굴러가는 중국에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각 정파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런데 보시라이의 경우 충칭시 서기에서 해임된 뒤 중앙정치국 위원 직무정지가 발표되기까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이는 각 정파가 심각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월스트리트저널도 '보시라이 해임, 정치 드라마의 제1막에 불과'라는 기사에서 "충칭시 서기에서 해임된 후 곧바로 단행됐어야 할 중앙정치국 위원직 정지가 한달 후 이뤄진 것은 계파간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를 살인 교사한 혐의가 있다는 것은 당 간부의 치부란 점에서 당에도 누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사실이 공표된 것은 당의 분열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보 전 서기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던 중국공산당이 굳이 중앙정치국 위원 직무까지 정지시키는 강수를 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권력 투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베이징=박일근특파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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