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자주 농아들을 본다. 집과 갤러리 사이에 국립서울농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농아들을 보면서 출근을 하고, 사진 관련 일을 하며 하루를 보낸 것이 전부다. 이런 날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농아와 사진을 잇대어 생각게 됐다. 어쩌면 사진이 가장 필요한 아이들은 저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사진은 대표적인 '시각언어'다. 때론 말과 글보다 훨씬 강력한 언어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사진이 농아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언어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사진가들이 농학교 아이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고, 그 아이들의 사진을 전시를 통해 나누어보자는 생각을 <빛으로 말하다> 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빛으로>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어느 날 전시장에 농학교 선생님이 전시를 보러 왔다. 사진을 전문으로 가르칠 교사의 부재, 카메라 등 기자재 문제로 특별활동에도 사진 클래스가 없다고 했다. 생각을 미처 못 했는데, 아이들이 사진을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이, 서랍에 종이 몇 장으로 들어있는 <빛으로 말하다> 를 잊지 않게 했다. 빛으로>
류가헌에 사진가들이 오고갈 때,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다. 내남없이 좋은 생각이라며 찬동을 했다. 자신들의 정체성과 예술적 도구로 이웃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에 기뻐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봉사'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높은 강사료까지는 아니어도 생활자인 그들이 마음 가는 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차비 정도는 지급해야 옳았다. 전시공간은 류가헌이 담당할 수 있지만 전시에 소요되는 액자제작, 인화 등의 비용도 문제였다.
작년 연말부터, 여러 문화예술 지원단체들에 지원신청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지원금을 얻는 일은 힘겨웠다. 형식은 복잡했고, 용어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러 조건과 맞아도 한두 가지 조건이 맞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기'보다는 '저기'를 알아보라는 답을 여러 번 들었다. 흘러흘러 장애인 국고기금에도 지원을 했다. 서류작성이 어려워 사업설명회를 들으러갔다. '장애단체나 비장애 단체가 장애인을 문화 수혜자로 할 때' 지원 가능한 사업이었다. 설명회장에서 만난 어떤 이가 장애단체와 비장애 단체가 지원신청을 하면 장애인단체에 더 가산점이 있다는 말을 전해줬다. 하다못해 대표자라도 장애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 딱한 시선으로 위아래를 훑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낙담하고 돌아 온 그날, 마침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진가들을 다시 만났다. 강사료는 안 받아도 좋으니, 시작해보자고들 했다. 한 세계가 다른 한 세계와 만나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을 익히 아는 이들이었다. 마음이 부자인 사진가들 덕에, 가난한 살림으로나마 꾸려 볼 용기가 났다. 서울지역 농학교들에 내용을 이야기하고 신청 학생들을 모집했다. 함께 하기로 한 네 명의 사진가들도 바쁘게 뛰었다. 학생들이 쓸 카메라를 협찬 받기 위해 여러 카메라 회사들에 제안을 넣었다. 몇 번의 완곡한 거절 끝에, 결국 N카메라회사로부터 필요한 수량만큼 농학교들이 카메라를 기증받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모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수업 진행을 위해서는 수화통역사가 필요했는데, 평소 사진에 관심이 있었다는 수화통역사가 자원봉사자로 참여 의사를 전해왔다. 마치 고립무원상태인데, 사방 언덕에서 지원군이 찾아드는 것 같았다. 기쁜 소식은 그 다음에도 이어졌다. 기대감이 없어서 발표일에도 인터넷 공고를 확인조차 않았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에 선정이 된 것이다. 사진가들 모두 아이처럼 반기며 기뻐했다. 소통은 그런 기쁨을 준다.
이렇게 해서 3월 <빛으로 말하다> 첫 사진 수업이 시작됐고, 벌써 네 번째 수업을 앞두고 있다. 수화로 진행되는 지극히 고요한 수업이지만, 학생들의 눈은 더없이 초롱하다. 12월에는 그 아이들의 사진을 모아 갤러리에서 <빛으로 말하다> 전시를 열 것이다. 농아 청소년들이 사진으로 자신들의 내면 풍경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사진이 빛의 예술이니, 곧 빛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 소통의 빛을 어서 보고 싶다. 빛으로> 빛으로>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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