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공책 서너 권 판 게 전부예요."
서울 중구 신당동 장충초등학교 앞에서 33년 동안 문방구를 운영해 온 유길선(56)씨는 요즘 한숨이 부쩍 늘었다. 개학한 지 한 달 넘게 지났지만 팔린 문구라고 해 봐야 공책 서너 권이 전부다. 유씨는 "3, 4년 전만 해도 등교시간이면 학용품이나 준비물을 사가려는 초등학생들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빴지만, 요즘에는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만 멍하니 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한탄했다.
장충초교 주변에 있던 문방구들은 모두 문을 닫고 유씨 가게 하나만 남았다. 인근의 청구초교, 광희초교 앞에는 문방구가 아예 없다. 경쟁은 줄었지만 유씨가 문방구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한 달 평균 100만원 남짓. 그마저도 하교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200~300원 하는 과자나 작은 장난감을 팔아서 벌어들이는 수입이다. 유씨는 "30년 동안 문방구를 해왔는데 이제는 때려치우고 싶어도 가게를 맡으려는 사람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동네 서점, 완구점에 이어 동네 문방구도 사라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9년에 전국 2만6,986개에 달했던 문구용품소매점은 2009년에 1만7,893개로 3분의 1 넘게 줄었다. 대형마트와 대형문구점이 급속히 늘면서 학교 앞 문방구에서 공책이나 연필 등 문구류를 사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인근에 일반 사무실이 있는 문방구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복사용지나 소모성 사무용품이 간간이 팔리기 때문이다. 반면 주택가에 위치한 문방구 주인들은 "뭘 팔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는 박모(45)씨는 "사행성이라는 비난은 있지만 뽑기나 게임용 카드 같은 거라도 팔지 않고서는 가게 운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도 영세한 문방구에는 달갑지 않은 요소다. 서울시교육청 등 전국 16개 교육청이 초등학교 학습준비물 무상지원을 위해 올해 확보한 예산은 학생 1명당 2~5만원 정도로 총836억원. 하지만 일선 학교들이 최저낙찰제 방식의 공개입찰을 통해 학습준비물을 일괄 구매한 뒤 학생들에게 지급하면서 가격경쟁력이 있는 대형 유통상을 제외한 대다수 영세 문방구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영중초교 앞 문구점 주인 김만형(68)씨는 "2년 전만 해도 학교의 배려로 매달 10여만원어치 정도 준비물을 납품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끊겼다"며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에는 공감하지만 영세한 문방구는 모두 문을 닫게 만들고 몇몇 납품업자만 살찌우는 지금의 방식은 바꿀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64개 문구 도ㆍ소매업체가 회원으로 있는 한국문구도매업협동조합의 김경래 이사장은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은 학부모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영세 문방구도 함께 살리는 상생정책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현행 일괄입찰 방식이 아니라 문구상품권 지급 방식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 앞 문구점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정책적 배려가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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