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가량의 C씨는 끈으로 손목이 단단히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렸다. 경찰은 4일 동안 때때로 코에 맹물을 들이부었다. 다음 3일간은 맹물 대신 비눗물을 사용했다. 마지막엔 후춧가루를 푼 물이 동원됐다. C씨가 탈진한 상태에서도 입을 열지 않자 경찰은 그의 발톱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한국인이 핀셋을 들었지만 머뭇거리다가, 대신 발가락 옆의 살점 일부를 떼어냈다. 피가 철철 흘렀고, 그게 피에 굶주린 경찰의 구미를 만족시킨 듯했다."
3ㆍ1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에 더해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박사가 일본에서 발행된 영자지 1919년 11월 29일자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글에 등장하는 C씨는 그 해 9월 강우규 의사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아 일본 경찰에 붙잡힌 조선인이다. 스코필드 박사는 당시 경찰이 점령지에서 얼마나 무도한 짓을 하고 있는지 일본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알리려 한 것이다. 그의 고발은 경고로 이어진다. "강제 동화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자연 법칙을 훼손하려는 시도는 외려 스스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스코필드 박사 서거 42주기를 맞아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가 12일 펴낸 643쪽 분량의 자료집 (서울대출판문화원)엔 이 글을 포함,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그의 기고ㆍ인터뷰 14편이 실렸다. 1919~20년 그가 일제 만행과 한국의 비참한 실상을 전하기 위해 일본ㆍ캐나다ㆍ미국 등 해외 언론에 보낸 것들로, 대부분 일제의 무단통치를 비난하고 한국에 독립과 자치를 허용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미국 유력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1920년 6월 7일자)와의 인터뷰에선 한국 여성의 애국심에 놀라워하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론 유일하게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된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이자 수의학자다. 191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 3ㆍ1 독립만세 현장 사진을 찍어 기록하는 등 독립운동을 돕다가 1920년 일제에 의해 반강제 추방됐지만 1958년 다시 돌아왔다. 1970년 영면할 때까지 서울대,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면서 사회 봉사 활동에도 헌신했다.
자료집에선 기고와 함께 그가 일제 학살 현장을 찾아가 작성한 보고서도 번역 소개됐다. 유진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장(카이스트 교수)은 "일제의 제암리ㆍ수촌리 만행을 스코필드가 국제 사회에 폭로한 건 알려져 있지만 구체적 내용은 그간 잘 소개되지 않았다"며 "그가 직접 쓴 자료들은 외국인의 객관적 비판을 담아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한편 경북도의회 의원과 재경경북도민회, 안용복재단 관계자 30여명은 이날 서울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 왜곡을 즉각 중단하고, 동북아 안정을 해치는 팽창주의적 영토 정책을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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