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법식대로라면 신랑이 처가에서 석 달은 살다 가야 하고, 요즈음 식으로도 사흘은 묵어가야 하지만, 아침 먹고는 전주서 삼십여 리 떨어진 삼례로 인차 출발할 예정이었다. 거기서 가족들은 물론이오, 인근 사람들과 잔치를 벌일 모양이었다. 아침에 일어난 오 동지가 부스스한 눈으로 윗목에 앉아 있던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어 간밤에 어떻게 되었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뭐가요?
내가 저 머시기…… 했던가?
나는 앙큼하게 대꾸했다.
흥, 성미가 급하여 옷이 다 찢어지는 줄 알았소.
그는 입을 헤 벌리며 멋쩍은 듯이 웃었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엄마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일어들났나?
예, 어머니.
세숫물 떠다주랴?
무슨 세숫물, 어서 일어나서 마당에 나가 훌훌 시언하게 세수해요.
내가 사정없이 이불을 걷어버리자 오 동지는 벗은 웃통을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어허 고뿔 들것네. 거 성미두 급하긴……
오 동지네 집은 거북산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을 등지고 남향받이에 자리 잡은 감나무골이란 데에 있었다. 견마 잡힌 말을 타고 앞서가는 오동지를 따라 나도 사인교를 타고 뒤를 따랐다. 가마꾼의 걸음걸이에 따라서 가마가 좌우로 흔들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오 동지네 식구는 부모님은 안 계시고 시할머니가 살아 있었고, 전처소생의 딸 하나와, 행랑에 중년의 노비 부부와 총각 마당쇠와 하녀 둘이 있었다. 시할머니는 고랑고랑하는 팔십이 다 된 노파였는데 해소 기침을 콜록대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대를 이어주기만 한다면…… 너는 우리 집안의 은인이지. 그저 어쨌거나…… 제발 덕분에 아들 하나만 낳아다우.
그런데 내 탓인지 동지가 원래 씨 모자란 위인이었는지 아들은커녕 애를 배지도 못하였다. 철철이 십전대보탕이다 사물탕이다 보음보양환이다 마시고 먹고 했어도 백약이 무효였다. 애를 태우던 시할머니가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집안은 온통 내 차지였다. 오 동지는 심심한 것을 못 참는 사람이라 가끔씩 전장이라도 둘러보고 농번기가 되면 주위 소작인들에게 술추렴이라도 해준달지 관리를 해야 될 텐데 노상 전주로 익산으로 싸돌아다녔다. 눈치로 보아 오 동지가 평소에 고을 아전붙이들과 안면이 넓은 것은 투전판을 드나든 때문이었다. 그는 익산으로 전주로 하인 하나 데리고 드나들며 사나흘씩 밤을 패고 들어와 열흘을 못 참고 다시 나가곤 했다. 내가 어쩌나 보려고 성미에 없는 앙탈을 부렸더니, 그는 눈가에 너구리 같은 안경 자국을 해가지고는 느릿느릿 대꾸했다.
고추 하나 낳아봐라. 낮이나 밤이나 까꿍 소리 하며 붙어 있을 테니.
이제 그러구 돌아댕기다 패가망신할 거야.
내 무슨 낙으루 살까. 까짓 노름 좀 해봤자, 땅을 떠가냐 산을 옮겨 가냐. 농사 지면 나락이 자라고, 가을 되면 다시 수천 석인데 아무 걱정 마라.
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별로 애를 태울 일도 없었으니, 처음부터 삼 년만 채우고 이 집을 떠나리라 작정을 하고 왔기 때문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고을마다 걸핏하면 민란이 일어나고, 화적떼도 사방에서 출몰하며, 한양에서도 왜놈이며 되놈이며 서양 코쟁이들까지 간섭하여 여러 차례의 변이 일어나고, 궁성이 조용한 날이 없다고들 했다. 엄마는 내가 시집오던 그해 봄에 전주의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예정대로 강경으로 이사를 갔다. 삼례에서 전주처럼 가깝지는 않아도 강경이라면 장꾼들 하룻길도 안 되는 육십 리 길이어서 세마를 내면 점심 먹고 출발해도 저녁은 친정집에 가서 먹을 만한 노정이었다. 그러나 가장이 집엘 들어와야 나들이 가겠다며 알리고 집을 떠나지. 그가 폭 빠진 것은 투전이나 가보잡기 같은 예전 것이 아니라 골패 노름이었고, 차츰 사나흘 외박이 아니라 대엿새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드디어 큰 탈이 닥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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