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계 생활용품 전문업체에 다니고 있는 정모(34)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회사의 꽤 잘 나가는 총무팀장이었다. 사장의 총애를 받으며 사장 비서 업무와 수출 관련 업무까지 1인 3역을 맡을 정도였다. 업무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회사에서 인정 받고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정씨에게서 그 행복을 앗아간 건 카드회사였다. 작년 8월 회사측이 A카드사에 정씨 명의의 법인개별카드를 신청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총무팀장 역할을 하려면 법인카드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2006년 가족이 잘못 선 보증 탓에 파산 경험이 있던 정씨는 혹시 과거 파산 이력이 알려지지 않을까 난감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정씨는 "설마 카드사가 개인 신용정보를 동의도 없이 회사측에 알려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정씨의 파산 경력 때문에 법인카드 발급이 거절됐다. 회사측이 카드사에 거절 사유를 캐물었고, 카드사 직원이 회사측에 카드 발급 거절 사유를 알려줬다.
한때 '파산자'였다는 낙인은 정씨가 8년여 간 회사에서 쌓아 올린 거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이미 파산 면책도 받았고, 지금은 대출 한 건, 연체 한 건도 없지만 회사는 그런 세세한 사정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회사 내에 소문이 급속히 번졌고, 독일 본사에도 이 사실이 통보됐다. 그의 업무가 하나 둘 줄어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출 관련 업무를 내놓게 했고, 최근엔 총무팀장 직책까지 박탈했다. 사장의 일정을 관리하는 단순 비서 업무가 남긴 했지만 이 조차도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단지 업무만 빼앗긴 게 아니었다. 파산자라는 이력 때문에 정씨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은 이보다 훨씬 더 심했다. "업무 상 택시를 탔는데 평소보다 좀 비용이 많이 나왔나 봐요. 왜 이렇게 비용이 많이 나왔느냐고 일일이 따지더라고요. 심지어 직원들과 같이 마시는 커피 비용까지 추궁을 당해야 했어요. 파산자니까 회사 비용을 착복할 수 있다는 거죠."
심지어 정씨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이 추가적인 신용 조회가 이뤄지기도 했다. 정씨는 8월 이후 두 차례 본인의 신용정보가 조회 당한 사실을 확인하고 카드사에 항의했지만 "본인 요청으로 조회가 된 것으로 확인됐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정씨는 휴가 중이었다.
카드사에서도 일부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 A카드 관계자는 "직원이 실수로 불필요한 이야기까지 회사측에 전했다는 점에 대해서 당사자에게 사과를 했다"고 말했다. 신용정보 조회에 대해서도 가장 최근 조회 건에 관해서는 "시스템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관계자는 "회사에서 직원의 법인카드 발급 불가 이유를 물었을 때 답해주지 않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인의 동의 없이는 신용정보를 해당 회사에 알려줄 수 없는 것이 기본 원칙.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행법 상으로는 개인 동의 절차를 밟지 않고 발급 불가 이유를 물어본 회사나 그것을 알려준 카드사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채지선기자 letmekno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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