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개구리 기질과 오기, 그리고 열등감이 나의 버팀목이었다"
영화 일을 한다. 감독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꽤 널리 알려져 있다. 대학생들이 닮고 싶어하는 인물로 종종 꼽히기도 한다. 그의 이름은 심재명, 직업은 영화제작자이고, 직함은 명필름 대표다.
몇 안 되는 충무로의 명사 중 하나인 그는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더욱 받고 있다. 첫사랑의 추억과 건축 이야기를 조화시킨 '건축학개론'을 제작해 246만 관객(10일 기준 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불러모았다. 사법부의 권위적인 행태에 일격을 가하며 논란을 일으킨 '부러진 화살'은 명필름이 마케팅을 진두지휘했다. 지난해엔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새 장을 열었고, 2010년엔 멜로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흥행시켜 충무로의 시선을 모으기도 했다.
강제규필름과 명필름의 합병으로 2004년 탄생한 MK픽처스에서 2008년 떨어져 나온 뒤 명필름은 흥행전선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개봉 영화 10편 중 2편 정도만 돈을 버는 게 충무로의 현실. 그런데 손을 대는 영화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흑자까지 기록하고 있으니 그 비결이 궁금할 수밖에. 게다가 그가 관여하는 영화들은 다들 "과연 되겠냐"며 손사래를 치던 작품들이다. 충무로에선 그를 미다스의 손이라 부르기도 하고, "신이 내린 것 아니냐"는 시샘 어린 평가가 따르기도 한다.
6일 오후 심 대표를 만나 영화에 대한 생각과 삶의 자세를 들었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논리정연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예전보다 흥행 성적도, 영화에 대한 평가도 좋다.
"MK픽처스 시절 작품성, 흥행성 측면에서 실패한 작품이 많이 나와 슬럼프도 겪었고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서 (분리하고 나올 때)결심을 했다. 작품성으로 평가 받든, 흥행을 하든 둘 중 하나는 꼭 하자고 마음 먹었다. 더 신중하게 작품을 선택했고, 작품 수도 줄었다. 작품이 줄면서 흥행 가능성이 늘어난 것 같다."
-'건축학개론'은 제작 초기 많은 반대에 부딪혔을 만도 하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제작자다. '건축학개론'은 10년 전부터 충무로에 돌아다니던 시나리오라는 걸 몰랐다. 이용주 감독이랑 친분이 있던 동생(영화사 보경사의 심보경 대표)이 2009년 시나리오 한 번 읽어보라고 줬다. 밤 늦게 읽었는데 막 웃다가 끝에 가서 찡하더라. 근데 만들기는 어려운 이야기다 싶었다. 해피엔딩도 아닌 첫사랑 얘기를 요즘 관객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젊은 직원은 다들 너무 올드하다고 했다. 원래 시나리오엔 여주인공 서연(한가인)이 바람 피우는 의사 남편에게 매 맞는 내용이 담겨있다. 요즘 그런 얘기가 너무 안 먹히니까 틀어서 서연을 퇴락한 아이돌 그룹 멤버로 설정해보자는 얘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여기까지 왔다."
-능력 있는 제작자이니 인간관계도 좋을 듯하다.
"난 인간 관계가 원활하거나 넓은 사람이 아니다. 그냥 어떤 사람을 열심히 관찰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떤 걸 원하고 어떤 걸 하고 싶어하는지 잘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감독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모르거나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영화 제작 과정은 협업이라서 다같이 잘 해야 한다. 인간관계 자체를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지는 않지만 서로 말이 잘 통하는 사람과 일하는 게 좋다."
-과연 이 영화가 될까 의구심이 드는 작품만 택하는 이유가 있나.
"원래 내게 청개구리 기질이 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난 아닌 거 같은데'라고 하는 오기나 고집이 있다. 돌이켜보면 남들이 반대하면 더 큰 의지에 불 탔던 것 같긴 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말을 정말 안 들었다."
-그래도 대중의 말은 잘 들어야 하지 않나.
"일하다 보면 어느 순간 관성적으로 움직이고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다. 어떤 게 잘 되고 어떤 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위험한 거다. 항상 매너리즘이 가져오는 오류가 있다. 본래 영화는 낯선 대중들과 소통하는 것이다. 어떤 특정 분야가 재미 있다, 없다를 정할 수는 없다고 본? 영화업계에서 잘 안 된다고 한 게 잘 되고. 잘 될 거라고 했는데 안 된 것도 많다. 폭발력이 있는 영화들은 그런 의외의 분야에서 나오는 것 같다."
심 대표는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고 했다. "영화과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께 말 꺼낼 용기가 없어 (동덕여대) 국문과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출판사를 거쳐 1987년 서울극장 기획실에 들어가며 충무로에 첫발을 내디뎠다. 워낙 오랫동안 생각하고 용기를 내 선택한 것이었기에 "영화계가 남자판이고 험하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면접에서 배우와 감독 이름, 영화 제목을 줄줄이 대니 "그걸 어찌 다 아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의 답은 이랬다. "(영화 월간지)스크린을 보고 다 배운 것입니다."
심 대표는 "영화판에 들어가고선 깜짝 놀랐다"고 회고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풍채 좋고 거친 말을 주고 받는 마초 제작자들이 많았기" 때문. 그는 "그런 분들 보면서 사실 쫄았다. 그래도 제 일은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당시 인연을 맺은 서울극장의 곽정환 대표는 심 대표가 제작자가 된 뒤에도 '미스 심'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초들의 영화계에서 일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 때 영화계는 지금보다는 덜 합리적이었다. 구태도 많았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주먹구구 식이었다. 사회 초년병 시절 너무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브로드캐스트'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이불 뒤집어 쓰고 울고 그랬다."
-남자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나.
"지나치게 여성스러워 보인다거나 약하게 보이지 말자고 생각했다. 원래 목소리도 남자처럼 씩씩하니까…. 영화 일 처음 할 때 어려웠던 게 홍보였다. 기자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부딪히고 접촉하는 게 힘들었다. 지금도 수줍음이 많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버팀목이 된 것인가.
"그렇다. 좋아하는 일 하고 있는 거니까. 난 지나치게 열등감이 많았다. 그래서 20,30대 때는 사실은 잘하고 있으면서도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계속 의심하곤 했다. 욱하면 뛰쳐나가거나 수틀리면 그만 두고 그런 게 나한테는 전혀 없었다. 지금도 가끔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성으로서 다른 분야에서 일했으면 더 성과를 올렸을까.
"글쎄 모르겠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대부분 힘들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영화계에서는 혈연, 지연, 성별, 학벌 등이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을 이길 수는 없게 되어있다고 본다. 누구의 줄을 타거나 관계를 활용한다는 게 별로 필요 없는 곳인 것 같다. 개인의 능력이 중요하다. 유연하고 진보적이고 상당히 자유로운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여대생들이 동경하는 인물이라 편지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다.
"에이 그런 게 뭘(웃음). 워낙 여성 제작자가 많지 않고 내가 매체에 자주 노출되기도 하니까 그런 듯하다. 편지가 오면 답장을 해준다. 항상 '결과보다는 과정을 보라'는 그런 뻔한 말을 한다.(웃음)"
-아무래도 영화를 하려면 젊은 감각이 필요할 텐데.
"(중학생) 딸과 대화를 많이 한다. 얼마 전 빅뱅 음반을 일부러 사서 듣기도 했다. 빅뱅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샀다. 영화 하는 사람들이 원래 생각이 젊고 철이 없다."
심 대표는 1995년 명필름을 설립하기 전까지 주로 영화 마케팅 업무에 종사했다. '결혼 이야기'의 '잘까, 말까, 끌까, 할까'라는 광고문구 등이 그의 머리를 거쳐 나왔다. 그는 "('투 문 정션'과 '와일드 오키드' 등의) 잘만 킹 감독의 영화 카피 등 말하기 민망한 야한 영화도 많이 담당했다"고 말했다.
심 대표의 첫 제작 영화는 '코르셋'. 뚱뚱한 여자의 연애기를 그린 영화였다. 남자들이 대부분인 투자 설명회에서 '술 집에 가도 못생긴 여자보다 더 용서가 안 되는 건 뚱뚱한 여자'라는 악평을 들은 작품. 극장을 찾은 한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난 돈 내고 절대 뚱뚱한 여자 못 본다"고 험담하는 것까지 그는 들었다. 역시나 영화의 흥행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개봉 첫날 서울극장에 늘어선 줄을 보고 자동차 안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한 술자리에서 회고하기도 했다.
-첫 작품도 그렇고 '바람난 가족'과 '해피엔드', '그때 그 사람들' 등 2000년대 초반 참 도발적인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다.
"'바람난 가족'과 '그때 그 사람들'은 임상수 감독이랑 영화를 해보고 싶어서 만든 작품이다. 그랑 함께 하니 센 영화, 도발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영화 자체가 도발적이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우리 사회에 뜨거운 화두를 던지는 그런 역할도 중요하다. 하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처럼 영화는 착한데 제작 시도 자체가 의미가 있는 그런 영화도 좋은 것 같다. 요즘 그런 영화들에 욕심이 더 간다. 그리고 내 나이 이제 쉰이 되지 않았나."
-제작한 32편의 영화 중 아끼는 작품을 꼽는다면?
"그런 거 진짜 없다. 어떤 영화는 잘 못돼서 아깝고, 잘 된 영화는 잘 된 영화대로 또 집안을 일으킨 장남 같은 느낌을 주고. 10년이 지나서 지금 봐도 세련된 느낌을 주는 영화는 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시대나 유행을 타지 않는 듯하다. '공동경비구역: JSA'도 대중성이나 내용에 있어 요즘 영화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떤 장르를 선호하나.
"20대 때는 괴기스럽고 잔혹한 영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결혼하고 아기 낳고 나이 들면서부터는 좀 더 성숙하고 편안한 영화를 좋아한다. 또 나는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와호장룡' 처럼 내성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우리 영화들도 활달하기보다는 내성적이다. 우리가 만든 사랑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다들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다."
-영화 만들면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10ㆍ26을 소재로 한)'그때 그 사람들'을 법원에서 잘라서 상영하라고 결정했을 때다. 한 편의 영화가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파장,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 등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 때 1면에 그 소식이 났던 신문들 쫙 펼쳐보면서 살다가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가슴 아프게 신문 1면에 났던 경험이 있다. 최근엔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기쁘게 신문 1면에 났었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생각나더라."
-이러다 영화 제작 못하겠다 싶을 정도였나.
"남편인 이은 (명필름 공동)대표, 영화 제작자인 여동생(심보경 대표) 등 동지들도 있었지만 너무 벅차서 마치 내 서버가 다운되는 느낌이었다. 그 때 얼굴에 아토피도 생겼고 영화 정말 그만둬야 되나 했다. MK픽처스 시절로 한 해에 4편씩 영화 만들고 8편씩 배급하던 때였다. 당시 어머니도 많이 아프셨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였다."
-영화 제작자로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건은 무엇인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데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십 년 간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일한다. 제작자의 역할은 그 사람들을 다 챙기고 책임지는 거다. '그때 그 사람들' 만들면서 소송을 당할 때도 내가 다 책임져야 했다. 감독보다도 더 무거운 책임을 지고 많은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럴 때 결단력이 요구된다."
-작품 욕심에 일단 질러놓고 뒷감당 못하는 제작자도 종종 있다.
"예술영화 제작자든 상업영화 제작자든 들어간 돈 정도는 뽑고 손해를 안 봐야 하지 않겠나. 감독은 제작비 회수를 책임지지는 않는다. 감독을 도와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해 훌륭한 완성도의 영화를 만들도록 하면서 본전 회수를 책임지는 것도 제작자다. 책임 안 지는 사람은 때려줘야 한다.(웃음)"
-만일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를 함께 작업했다면?
"난감한 질문이다.(웃음) 강 감독님 정도면 (제작 과정에서)반대를 한다고 해서 그만두실 분이 아니다. 단지 좀 더 나은 방법은 무엇일까에 대해 도움을 드렸을 것 같다. 좀 더 성공 확률을 높여드리는 쪽으로 일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를 하면서 진짜 행운이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나.
"진짜 많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제작 초기 서해교전이 터져 개봉 못할 줄 알았는데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한다고 발표했다. 시대가 마케팅을 해준 셈이다.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도 과연 개봉이나 할 수 있을까 할 때 한국과 일본의 올림픽 예선 재경기 결정이 내려져 화제가 됐다."
-독서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데.
"아니다. 책 안 읽는다. 아는 것도 없고. 그래도 학창시절에는 책 많이 읽었다. 어려서 집이 가난해 계몽사 소년소녀문학 전집도 없었다. 그래서 친척집 가서 몇 권씩 빌려서 읽고 반납하고 그랬다. 그런 일종의 결핍 같은 게 내게 힘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렸을 때 자신을 사로잡은 영화는 무엇인가.
"난 (TV)주말의 명화 세대다. 5학년 때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젊은이의 양지'를 보고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미술을 공부할까 고민하던 중학교 2학년 때 프랑스영화 '몽파르나스의 등불'을 보곤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흥행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국악영화 '두레소리' 개봉(5월10일)을 준비하고 있다.
"'서편제' 이후로 국악영화가 나온 게 없어 꼭 해야겠다는 생각에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 주인공 슬기는 드라마 '대장금'의 '오나라'를 불렀던 친구다. 진짜 국악 하는 학생들이 배우로 등장한다. 실제 음악 선생님이 출연하기도 한다. 특별한 영화다. 그래도 이 같은 고난의 영화는 처음이다. 유명배우가 등장하지 않으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도대체 영화가 뭐길래….
"영화는 내 꿈이자 밥이다. 꿈꾸었던 대상이었는데 그걸 통해서 밥을 먹고 사니까…."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고경석기자 kave@hk.co.kr
최다인 인턴기자 (숙명여대 정보방송학과 3년
■ 재목들 연금술사로
1992년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인상적"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관객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97년 '3인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번째 작품까지 흥행에 실패하면 감독으로선 수명이 다할 위기. 박찬욱 감독은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대가로 거듭났다. 박 감독은 종종 'JSA'를 자신의 영화인생의 전환점으로 언급한다.
박 감독뿐 아니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를 만나 상업적 재활에 성공한 감독들이 여럿 있다. '세 친구'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만들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던 임순례 감독도 대표적이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며 흥행 감독 대열에 끼었다.
김현석 감독은 '스카우트'의 흥행 실패를 '시라노; 연애조작단'으로 극복했다.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도 '불신지옥'으로 연출력을 인정 받았으나 상업적 성공이 절실했다. 이런 사례들 때문에 심 대표는 충무로에서 '재활의 명수'라 불린다. 심 대표는 "사람은 너무 잘 나갈 때 거품이 낄 수 있다. 잠재력과 재능이 있는데 단지 일이 잘 안 풀린 사람이라면 함께 일하기 좋지 않냐"고 반문한다.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는 눈도 심 대표의 장기다. 김지운 감독('조용한 가족'), 장윤현 감독('접속') 정지우 감독('해피엔드') 등이 그와 함께 상업영화 데뷔식을 치렀다.
심 대표와 일했던 감독들 대부분은 자기 생애 최고 흥행기록들을 명필름과 함께하고 있다. 'JSA'와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 '해피엔드' '바람난 가족'(임상수 감독) 등이 대표적이다. 심 대표는 "잠재성이 보이는 감독이나 배우를 발굴해 중요한 영화인으로 자리매김 시킨 것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이 있다"고 말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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