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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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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8>

입력
2012.04.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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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눕다가 잠이 깼다. 가까운 곳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잠이 깼는지도 모른다. 밥 해줄게 부헝, 떡 해줄게 부헝, 울지 마라 부헝, 가지 마라 부헝. 옆 자리에서 엄마는 가끔 입맛을 다시며 열심히 자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돌아누웠는데 어느 결에 눈가를 흘러내린 눈물이 베개를 적셨다. 저 놈의 부엉이 멀리 쫓아버려야 해. 나는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섰다. 그믐이라 마당도 안 보일 만큼 캄캄했고 바로 옆에서 나직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쟁이에 속곳 차림에 맨발인 나는 으쓱해서 얼른 들어간다는 게 건넌방 미닫이문을 살짝 열고 들어섰다. 그러고는 주춤 섰는데 코 골던 소리가 갑자기 그쳤고 내 숨도 멎었다. 어둠 속에서 손이 쑥 솟아올라 내 발목을 잡았고 두 팔로 나를 끌어내려서는 이불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어느 결에 그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다.

이제 내가 시집갈 날짜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나는 저녁을 먹고 엄마와 같이 남천가로 나가 아이들이 쥐불놀이를 하는 걸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걸궁패가 농악을 신명나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락을 잡는 날라리 소리가 간드러지게 앞서 나간다. 이신통은 충청도 지방으로 간다며 길을 떠났는데, 언제 돌아올지도 몰랐고 그가 돌아올 때쯤에는 나는 오 동지네 안방에 들어앉아 있을 터였다. 그가 떠나면서 함께 가자고 했더라면 나는 능히 따라나섰을 것이다. 이신통이네 가족은 보은에 산다는데 부친은 의원이라고 했다. 아무리 경서를 읽었어도 서얼은 과거에 나갈 수 없는 시절이어서 그의 부친도 공부하고 남은 재간으로 약방을 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청주에서 아전을 지내는 형이 있었고 이제는 양가에 시집간 누이동생이 있었다. 이신통은 형과 함께 서당에 다니며 글을 읽었고, 중인이 할 수 있는 무반이라도 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의원 일을 돕다가 스물두 살에 고향을 떠나 한양에도 가 있었고, 제 입으로 말한 대로 연희패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혼자 전기수로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간간이 방각본 책들을 받아다 각 대처에서 책전을 벌이기도 하고, 책을 필사해주는 사서 노릇도 하며 떠돌아 다녔다. 그는 아직도 해사한 책방도령 같은 얼굴이었는데도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다.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먼 하늘에 노을의 자취만 남았고 오리들이 가늘게 울면서 높은 하늘 속을 날아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불놀이의 불꽃이 들판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엄마 정말 강경 가서 살려구?

에그 술장사라면 이제 지긋지긋허다. 저 누구냐, 이신통이 말이 그럴듯하더라. 임 비장하구두 논의를 해볼 참이여. 너 보내놓고 장쇠 데리구 강경 바람 좀 쐬구 올란다.

나는 엄마가 남에게 좀처럼 속거나 엎어치기를 당하지는 않을 맵짠 아낙임을 알고 있어서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신통 그 사람을 시집가기 전에 꼭 한 번만 더 만나보고 싶었다. 엄마는 털배자에 누비덧저고리까지 걸치고 나왔는데도 춥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불구경 잘 했다. 어서 집에 가서 구들장에 좀 지져야 되겠네. 너 가서 정 못 견디겠으면 석 삼 년만 눈 꼭 감고 살다 와라. 까짓것 아들 하나 쑥 낳아주구, 이별전 받구 파하면 그담엔 니 맘대루야.

흥, 나처럼 딸 낳으면 무슨 괄시를 받으라구.

그럼 그냥 미투리 거꾸로 신구 돌아오너라.

나 아버지한테 기별 않구 가두 될까?

박씨 댁 얘기는 아예 입에 담지두 마라. 우리 모녀를 저희 뒤란에 개나 돼지 보다두 못 허게 보던 것들이여. 나는 그 집 종년들이 이바지하러 갈 때마다 눈알을 부라리던 게 지금두 잊히지 않는다.

양갓집에서 들으면 관기 첩이 서얼 딸을 낳아 부잣집에 팔아먹었다고 수군거릴 노릇이지만 나는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착한 농사꾼 만나 길쌈 하고 빨래하고 우물가에서 수다 떨고 쑥개떡 쪄먹고 살 기질은 내 핏속에도 아예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신통 같은 뜨내기를 못 잊게 되었으니 나는 엄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부황한 근본이 어디로 가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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