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고 촌에 나아가서 부모님 모시고 아이들 데리고 농업에 심씨면서(힘쓰면서) 귀체 보중할 것을 부탁하고 또 부탁합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보호하고 길러서 앞으로 좋은 날 보소서.'
1950년 10월 11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3개월여. 북진하던 미군과 한국군 제1사단이 평양에 첫 발을 내딛기 열흘쯤 전 평남 순천의 남편이 황해도 해주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인민군에 입대해 '밤이면 가고 낮이면 잠자'며 북으로 북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된 남편의 글에서는 아내 걱정, 자식 사랑과 함께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스친다.
한국전쟁 중 미군이 대량으로 노획한 북한 문서 중 미수신 편지ㆍ엽서를 골라 실물 사진과 함께 그 내용을 소개한 (삼인 발행)가 나왔다. 책을 엮은 이흥환씨가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이 편지와 엽서가 든 '1138' '1139'번 상자를 만난 것은 2008년 11월.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접고 워싱턴에 있는 독립연구기관 'KISON'(Korean Information Service On Net)의 편집위원을 맡아 한국 관련 문서 발굴ㆍ연구를 하던 중 국립중앙도서관의 미국 노획 북한 문서 디지털화 작업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이 위원에 따르면 NARA에 소장된 북한 문서는 한국 연구자들의 보물 단지 같은 것이다. 2,000개를 훌쩍 넘는 상자 속의 북한 문서들이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728통의 편지와 344장의 엽서를 모아 놓은 이 상자는 별로 손댄 흔적이 없었다. 미국 정부가 비밀 해제(1977년)하고도 30년이 더 지난 시점이었다.
서신들은 한국전쟁 발발 전후인 1950년대 쓴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 해 9, 10월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많은 것으로 보아 미군이 평양 점령 당시 미처 배달되지 않은 편지를 대량 노획한 것으로 이 위원은 추측했다. 누런 마분지로 접어서 만든 봉투, 신문지 여백에 써내려 간 깨알 같은 사연 등 외형만으로도 당시 형편을 짐작하게 한다. 북한 내에서 오간 것이 다수이지만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또 중국 소련과 오간 것도 있다.
10월 중순 평남 양덕에서 조국보위 호위부 선전지도원으로 일하던 남편에게 사법 연수중이던 아내가 쓴 편지에는 '어떡하든지 후방 사업하고 군대에는 절대 가지 마시요' 하는 근심으로 가득하다. 고향을 떠나 일하러 나왔거나 입대한 남편들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이들 '죽이지 말고 길러' 달라, '어떻든 목숨만 붙어놔' 달라는 안타까운 호소가 담겨 있다. 평양의 분대장 아들 앞으로 보낸 어머니의 짧지만 정갈한 편지에는 '집에 대하여 근심하지 말고 너의 몸과 너의 건강만 부디부디 부탁한다'는 아들 사랑이 가득하다. 고향 친구들에게 자식 셋 군대 보낸 어머니를 위로해달라는 내용, 공습으로 세상 떠난 가족 이야기를 전하는 글도 있다.
평양 내무성 통신소대에 입대한 아들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싸게' '도리닝구(윗저고리)' '사루마다(속바지)' 등을 챙겨 면회 오라고 어리광 부리고, 강원도 여성은 인민군에 입대한 연인에게 '나는 매일 당신 올 때를 고대'하며 '당신도 나를 끝까지 사랑하면 나도 당신을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맹세한다. 중국으로 보내는 연애 편지에는 '미제가 망할 날도 멀지 않으며 장개석의 죽을 날도 멀지 않'았다며 '문제가 이렇게 되면 우리들의 만날 날도 불과 멀지~'라고 썼다. 평남 강서군에서 대구의 인민군에게 보내는 편지는 '전쟁의 종국적 승리와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영용무쌍하게 싸워달라'는 이념과 사상, 국가의 논리로 가득하다.
이 위원의 말대로 이 편지들은 비록 사신(私信)이지만 '짧으나마 뒤죽박죽 헝클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한 시기를 조명하는 1차 사료로 평가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엄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이만큼 살아 숨쉬는 인간의 숨결을 담아낸 사료가 과연 또 어디 있을까.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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