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닫아라, 아니면 떠나게라도 해달라"
"원전은 마약과 같았다. 보상금과 개발에 눈이 멀어 우리의 삶을 잃어가는 것도 몰랐다. 이젠 깨어나려 한다."
강주훈(58)씨는 11대를 이어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살고 있다. 그는 고리원전을 짓기 위해 한국수력원자력(당시 한전) 직원들이 마을을 찾은 73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군사정권 시대에 '나랏일'에 감히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굴뚝이 들어서면 지역경제가 좋아진다'며 환영했던 것도 사실이다." 2007년 고리1호기 수명 연장 때는 주민대책위원장 자격으로 협상을 벌였다. "연장을 반대하며 2년을 끌었지만 결국 대통령 선거 전 날 도장을 찍었다. 이명박씨가 정권을 잡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지난해 3월 쓰나미가 마을을 삼키고 불길이 치솟은 일본 후쿠시마원전, 곧이어 터진 고리1호기 고장을 지켜보면서 모골이 송연해졌지만 그래도 참고 또 참았다. "한번의 사고로 모든 게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부들부들 떤 이들이 많았지만 주민이 시위하면 장안읍 경제가 몰락하지 않겠느냐는 우려, 또 보상이나 요구한다는 외부 시선이 두려웠다"고 강씨는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지 않겠다"고 강씨는 주먹을 쥐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이제껏 참고 살아왔다. 과거처럼 회유하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눈을 부릅떴다. 강씨는 "잘 사는 걸 떠나,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일어섰다"며 "무조건적인 1호기 폐쇄와 함께 한수원 사장,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원장, 원자력안전위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2월 고리1호기 완전정전 사고를 한달이나 숨긴 사실이 드러난 뒤 고리원전본부가 위치한 기장군 장안읍 주민들의 불안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사고와 은폐, 앞서 터진 납품비리로 원전에 대한 신뢰는 싹 사라졌다. 주민들은 아무런 보상 조건 없이 '1호기 즉각 폐쇄'를 요구하고 나섰고, 고리원전 최인근 길천마을 주민들은 집단 이주를 요구하고 있다.
김명복 길천리 이장은 "눈만 뜨면 무서운 건물이 보이는데, 누가 계속 살고 싶겠냐"며 "이번 사고와 은폐로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920여 세대 3,000여명이 살고 있는 길천리는 고리원전과 최단 700m 떨어져 있다.
길천리 주민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타지로 나가 살겠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88년 즈음이다. 86년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면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고리1호기의 부품이 중고투성이다" "1호기 솥뚜껑(격납용기)이 뒤틀려있다"는 말도 돌았다. 그러다 민주화투쟁을 거치며 주민들의 불안이 한 목소리가 된 것.
하지만 집단이주 요구는 묵살당했다. 그러다 2007년 1호기 수명 연장과 함께 길이 열렸다. 발전소주변지역지원사업비 중 151억원을 이주비로 책정한 것. 그러나 원전 주변의 지가가 워낙 떨어진 상태라 보상 대상 가구 중 절반 가량은 보상금으로 마땅한 이주지를 찾지 못해 주저앉았다. 지난해 후쿠시마원전 사태를 계기로 집단이주 요구가 재점화돼 지난해 7월 한수원, 기장군과 함께 3자협의체를 만들어 이주 필요성에 대한 용역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강씨는 "원전이 들어섰던 지난 1978년, 장안읍 인구가 2만명이 넘었지만 현재는 1만명도 채 안 된다"며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구해 외지로 나가고, 외지에선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장안읍 월래리 토박이인 서용화(57)씨는 "78년 이전에는 월래해수욕장이 경관이 아름답고, 교통이 잘 발달돼 지금 해운대처럼 인파가 북적댔다"며 "원전으로 사라진 고리항도 한참 성황이었기 때문에 원전이 아니었다면 어업과 관광업으로 더 발전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부산=강성명기자 smkang@hk.co.kr
■ 원전 당장 폐기할 수는 없지만… 수명연장·추가건설 멈춰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도 한국 정부는 원자력발전 중심 에너지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오히려 원전 수출 경쟁국이던 일본이 타격을 입으면서 한국이 '원전 르네상스'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며 반기는 분위기마저 역력하다. 그러나 '싸고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라는 원자력 신화에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학계와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대안을 찾기 위한 노력도 활발하다. 원전을 둘러싼 주요 쟁점을 짚어본다.
원자력발전은 값이 싸다?
현재 운영 중인 국내 원전은 총 21기. 전체 전력의 35%를 여기서 얻는다. 정부는 2024년까지 원전 14기를 추가 건설해 2030년 원전 발전 비중을 59%까지 높인다는 계획이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6%에 달하고 철강 석유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이 많은 산업구조 상 급증하는 전력소비를 무리 없이 감당하려면 값싼 원자력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부가 한국일보에 공개한 2011년 기준 발전단가 비교자료에 따르면 원자력은 kWh당 39.1원으로, 풍력(100.9원) 수력(136.1원) 액화천연가스(142.3원) 등보다 월등히 싸다. 그러나 원전 건설ㆍ해체비용 등을 모두 반영했다는 이 수치에 학계와 환경단체에서는 의구심을 보인다. 노진철 경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원전 폐로 및 장기간의 핵폐기물 관리 비용 등을 고려하면 원전의 경제성은 훨씬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실제 일본 정부가 구성한 '발전단가 검증위원회'가 지난해 말 낸 보고서에 따르면 원전의 발전단가는 kWh당 8.9엔으로 석탄(9.5엔) LNG(10.7엔) 등 화석연료와 큰 차이가 없다. 더욱이 2030년 전망치를 보면 원전은 큰 변화가 없는 반면, 풍력(8.8엔)과 태양광(9.9엔)은 크게 낮아져 원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단가 계산에는 이산화탄소 감축 비용, 원전의 사고위험 대책 및 원전입지 교부금 등 사회적 비용이 반영됐다. 후쿠시마 사고로 인한 손실 추정치(약 82조원)도 포함됐는데,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331조원으로 추산한 경제적 피해 규모까지 감안한다면 원전의 발전단가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원자력은 깨끗하고 안전하다?
정부는 원자력을 친환경 청정에너지로 분류해 이른바 '녹색성장'의 기조로 삼고 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원전산업계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UNFCCC) 때마다 원전을 청정개발체제(CDM) 방식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CDM는 개발도상국을 도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면 그만큼을 해당 국가의 온실가스 감축 실적으로 쳐주는 제도로, 나무심기, 폐열 발전 등이 있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장은 "원전이 청정에너지라면 국제사회가 왜 이런 요구를 외면하겠느냐"고 꼬집었다.
재생에너지와 비교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적지 않다. 2008년 국제학술지 에 따르면 kWh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풍력이 9g, 바이오가스가 11g, 태양광이 32g인데 비해 원전은 평균 66g다. 양이원영 서울환경운동연합 탈핵에너지국장은 "원전이 깨끗한 에너지라는 정부 주장은 입맛에 맞는 사실만 내세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1979년 스리마일, 1986년 체르노빌, 2011년 후쿠시마까지 30여년간 전 세계를 공포로 떨게 한 대형 사고가 세 번이나 터지면서 원전의 안전 신화는 이미 무너졌다. 안 소장은 "그런데도 정부는 원전에서 사고 날 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강변할 뿐 아니라 지역주민의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아예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안은 있다? 없다?
정부의 '대안 부재'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국내 1인당 전력소비는 1990년 2,202kWh에서 2009년 8,323kWh로 3.8배 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1.2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산업구조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도 어렵다.
그러나 현실 타령만 할 게 아니라 목표를 세워 접근한다면 대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당장 원전을 폐기할 순 없지만 추가 건설과 수명 연장을 중단하고 대체에너지 개발 등에 투자해 원전 비중을 점차 줄여가야 한다는 주장이 사회적으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일례로 에너지대안포럼이 지난달 제시한 '2030 에너지 대안 시나리오'는 수요ㆍ공급 관리를 통해 점진적인 탈 원전 정책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포럼은 ▦수명을 다한 원전 폐기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전기 수요관리를 전제로 5가지 대안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가장 소극적인 안인 A1(2030년까지 전기료를 가정용 매년 1%, 산업용 연 1~3%씩 인상+건설 중인 원전 5기는 완공하되 2057년까지 모든 원전 폐기)의 경우도 발전비용(2010~30년)은 정부안의 1.04배로 큰 차이가 없고 재생에너지 산업 활성화에 따른 고용증가 효과는 정부안의 1.26배로 전망됐다.
물론 이를 실현하려면 전력소비 감축 노력과 전기료 인상 등 국민들의 일정한 희생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모든 정보에 대한 투명한 공개가 뒷받침돼야 한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전기료를 인상하는 대신 근로소득세 인하 같은 방식으로 가계 부담을 덜어주면 에너지 과소비 구조를 바꾸면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한기자 tellme@hk.co.kr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 "원전은 화장실 없는 호화주택 더 짓겠다는 것은 미친 짓"
"원자력발전소는 '화장실 없는 호화주택'입니다. 이런 걸 더 지어 원자력 의존도를 50%까지 늘리겠다고요? 미친 짓이죠."
5일 만난 최기련(65) 아주대 에너지학과 교수는 "정부가 안전한 폐기방법이 없는 원전을 무책임하게 확대하려 한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에너지자원기술개발지원센터 소장, 고등기술연구원장, 차세대성장동력 포럼 회장 등을 역임한 에너지 전문가다.
최 교수는 '원자력은 싼 에너지원'이라는 정부의 주장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정부는 ㎾h 당 원자력 발전단가가 3.75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발전소 건설비와 유지비를 뺀 것이라 실제 가격보다 훨씬 축소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부는 '영업비밀'이라며 건설비와 유지비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는 "10여년 전만 해도 원자력 발전단가는 37.31원으로 정부 발표보다 10배는 비쌌다"며 "원자력 단가는 10분의 1로 축소하면서 개발 초기단계여서 비싼 태양열, 풍력 등과 비교해 싸다고 말하는 정부의 주장은 억지"라고 지적했다.
원자로 54기를 보유한 일본이 최근 공개한 원자력 발전단가는 ㎾h 당 8.9엔(134원) 이상. 원자로의 수명 40년 안에 대형사고가 한 번 발생한다는 가정이 포함된 것으로, 대부분의 원전이 노후화 된 우리나라에도 무난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최 교수는 '원자력은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원'이라는 정부의 주장도 문제 삼았다. "짓기는 쉽지만 수명(30~40년)이 다하면 현재 과학기술로는 안전하게 폐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수명이 끝나도 연료봉에서 방사능이 계속 나오는 탓에 과열되지 않게 식히면서 지켜보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방사능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장장 2만년으로 한민족 역사의 4배가 넘는 세월 동안 폐원전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원전을 어떻게 해야할까. 최 교수의 해법은 간명하다. 정부가 원자력발전의 한계를 투명하게 밝히고, 원자력 의존도를 높일지 낮출지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원전을 안전하게 관리할 방법을 개발하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이 원자력 발전단가를 공개한 것이나 원전 의존도가 매우 높은 프랑스가 원전 정책을 재검토 하는 것들이 모두 이런 흐름"이라며 "우리나라만 세계적 흐름에 역행할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유에 대해 "나는 관변학자이기 때문"이라는 의아한 대답을 했다. "국비 유학으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고, 여러 국책 연구기관을 거쳤으니 나를 키운 건 8할이 국가죠. 그러니 저는 관변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계속 살아야 할 국가인데 짧은 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현 정부가 국가의 미래에 위협이 되는 잘못된 결정을 한다면 관변으로서 쓴 소리를 해야만 합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 독일 시민들 지속적 저항에 정부 "원전 수명연장 없이 모두 폐쇄"
지난해 3월 일어난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곳은 지구 반대편 독일이었다. 더구나 핵 산업에 우호적인 물리학자 출신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탈핵을 택해 그 파장은 더 컸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5월 30일을 탈핵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후쿠시마가 내 생각을 바꿨다. 우리에게 안전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독일의 탈핵 결정을 이끈 것은 핵발전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었다. 1970년대 이래 정부의 일방적인 핵발전소 건설 추진에 성난 주민들은 지역별 주민조직을 만들어 저항했다.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들은 반핵 후보를 지방의회에 내보냈고, 이러한 활동은 1980년 녹색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1986년 구소련의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여파가 1,000km 떨어진 독일에도 몰아쳐 독일 전역에서 갑상선암 발병이 늘고, 다운증후군 신생아 출산이 급증했다. 핵발전의 실체를 여지없이 보여준 체르노빌 이후 반핵운동과 함께 핵발전의 대안을 찾는 시민 차원의 노력이 본격화됐다.
메르켈 정부의 결정에 앞서 독일은 이미 핵폐기를 선언한 바 있다.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정부는 2000년 핵산업계를 설득해 새 핵발전소 건설 불허와 기존 핵발전소의 수명 한도 내 운전을 틀로 하는 '핵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원자력법(AtG)을 개정해 2021년 또는 2022년까지 핵발전소를 모두 폐쇄하는 일정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ㆍ자민당 연정은 2010년 이를 뒤집고 핵발전소 수명 연장을 밀어붙였다. 성난 시민들은 베를린 총리 공관과 오래된 핵발전소를 인간띠로 에워싸는 등 연일 반대 투쟁을 벌였다. 후쿠시마 사고 직후인 지난해 3월 26일에는 베를린 뮌헨 등 4개 대도시에 반핵운동 사상 최다인 25만여명이 모여 독일의 모든 핵발전소 폐쇄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에 놀란 메르켈 총리는 성직자, 학자, 정치인 등 17명의 사회원로들로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를 구성해 핵폐기 시점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위원회는 TV생방송 공개토론을 포함한 8주간의 활동 끝에 2021년까지 핵발전소 17기를 모두 폐쇄하라는 권고안을 냈고, 메르켈 정부는 1년을 늦춰 2022년 핵폐기를 결정하게 됐다.
독일이 선택한 대안은 에너지 효율화와 재생가능에너지다. 독일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에너지원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에너지 빈국이다. 온실가스 감축 의무도 만만치 않은 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결정한 독일은 우선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사고의 위험이 없는 재생가능에너지를 늘려가는 전략을 세웠다. 에너지 다소비형 제조업 중심의 세계 4위 경제대국인 독일은 1990년 이래 1인당 에너지 소비가 계속해서 줄고 있는데, 2005년 현재 4.21 TOE(석유환산톤)로 한국의 4.83 TOE보다 적다.
동시에 재생가능에너지의 보급은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 2000년 제정된 재생가능에너지법(EEG)이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1990년 3.1%에 그쳤던 전체 전력에서의 재생가능에너지 비중이 2011년 말 20%를 넘어섰다.
핵폐기, 에너지 효율화, 재생가능에너지 확대를 중심축으로, 독일 정부는 2010년 말 2050년까지의 에너지 비전을 담은 '에너지 콘셉트'를 발표했다. 온실가스 배출은 1990년 대비 80~95%를 줄이고, 1차 에너지 소비와 전력 소비는 2008년 대비 각각 50%, 25%를 줄인다는 계획이다. 반면 재생가능에너지는 최종 에너지 소비 중 60%, 전력에서는 80%까지 그 비중을 늘린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와 별개로 정부 환경자문위원회(SRU)는 2011년 1월, 환경부 산하 기관인 독일연방환경청(UBA)은 더 앞선 2010년 7월 자체 연구를 통해 2050년까지 모든 전력을 재생가능에너지만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했다.
에너지 효율화와 재생가능에너지 분야는 독일의 경제성장을 이끄는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겨울이 춥고 긴 독일은 전체 에너지 소비의 절반 가량이 건물 난방에 이용된다. 정부는 각종 규제 정책과 다양한 지원 사업을 병행해 건축물의 에너지 효율 개선 사업을 진행 중인데, 매년 30만 채의 오래된 건축물을 대상으로 리노베이션을 펼쳐 총 2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국책은행인 KfW는 정부를 대신해 에너지 효율화 개선 내용에 따라 무상 대출 또는 저리 융자를 해준다.
재생가능에너지의 폭발적인 성장은 독일이 세계 금융위기에도 별다른 영향 없이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매년 200억 유로 이상이 재생가능에너지 산업에 투자되고 있으며, 2010년 말 현재 총 36만개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된 것으로 정부는 밝히고 있다. 조만간 독일 경제를 이끌었던 자동차 산업을 뛰어넘을 것으로 많은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시민들의 저항에서 시작된 독일의 탈핵 결정은 시민의 안전과 경제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핵산업에 우호적이었던 메르켈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직후 탈핵으로 입장을 전환해 이 두 마리 토끼가 주는 덕을 톡톡히 즐기고 있다.
■ 지구촌에 거센 탈원전 바람
핵과 인류의 평화적 공존은 가능한가. 지난해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안전한 원전 신화'가 다시 뿌리째 흔들리면서 원전 폐기를 고민하는 나라들이 늘고 있다.
일본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경험한 유일한 나라이면서도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논리에 기대 원전 건설을 늘려왔다. 그 바탕에는 일본이 패전을 딛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원전을 통한 값싼 전력 공급이 크게 기여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일본은 후쿠시마 사고 직전까지 전력 생산의 30%를 원전에 의존했고, 장차 50%까지 늘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고 이후 사회적으로 원전을 보는 시각이 180도 바뀌었다.
일본은 현재 원전 54기 중 53기의 가동을 중단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 1~6호기는 이미 폐로 절차에 들어갔고, 도카이 지진의 진원지에 세워진 하마오카 원전은 쓰나미 대비책을 세운다는 이유로 휴업했다. 나머지도 정기점검을 위해 속속 가동을 멈췄고, 마지막 남은 홋카이도 도마리 원전 3호기가 내달 가동을 멈추면 원전은 올스톱 상태가 된다.
정부는 장기적으로 원전 의존도를 줄여가되 가용 원전은 최대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안전진단을 마친 오이 원전 3ㆍ4호기를 재가동하기 위해 주민 설득에 나섰지만 워낙 반대가 거세 여의치 않다. 로이터통신은 일본 정부가 원전이 올스톱 되면 국민에게 원전 운영의 불가피성을 설득하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원전 가동 중단에 따른 전력 부족을 화력발전과 액화천연가스로 메우느라 지난해 연료수입비가 전년대비 3조엔 늘어나면서 31년 만에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것도 큰 부담이다.
일본은 당초 원전 수명을 40년으로 하고 예외적으로 20년을 연장하는 법안을 추진했다가 반대 여론에 밀려 40년을 넘은 원전은 가동하지 않기로 했다. 신규 원전 건설도 백지화한 상태여서 향후 40년 이내에는 원전 없는 사회가 구현된다. 그 대안으로 재생가능에너지 개발이 활발하다. 특히 재일동포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은 "휴경농지의 20%에 태양광 발전패널을 설치하면 원전 50기에 해당하는 5,000만㎾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교토, 군마, 도쿠시마 등 지자체와 손잡고 태양광 발전소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탈 원전 바람이 가장 거센 곳은 유럽이다. 독일 말고도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 등이 원전 폐기를 결정했다. 특히 전체 전력의 절반 가량을 원전에서 얻는 벨기에와 스위스의 행보가 주목된다. 벨기에는 지난해 10월 운용 중인 원자로 7기 중 노후한 3기는 2015년까지, 나머지도 2025년까지 폐로하기로 했다. 스위스도 지난해 5월 탈원전을 선언했다. 현재 운영 중인 원자로 5기를 수명이 끝나는 대로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폐로하고 새 원전을 짓지 않는다는 것. 원전을 폐쇄하는 데는 무려 38억 스위스프랑(약 3조6,000억원)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두 나라 모두 대안으로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일 계획이다.
이탈리아는 체르노빌 사고 직후인 1987년 국민투표를 거쳐 탈 원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전력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자 2014년부터 원자로 4기를 건설하고, 2030년까지 원전 발전비중을 25%로 높이는 방안을 세워 반발을 샀다. 지난해 6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주도한 국민투표에서 94%의 반대로 원전 재가동이 거듭 부결돼 탈 원전 정책을 유지하게 됐다.
미국 다음으로 보유 원전 수(58기)가 많고 전체 전력의 75%를 원전에 의존하는 프랑스에서도 탈 원전 논의가 나오고 있다. 22일 치러질 대선을 앞두고 사회당 후보인 프랑수아 올랑드는 원전 의존도를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대선 결과에 원전의 운명이 달린 셈이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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