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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6> 모스크바와 상하이에서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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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조봉암을 다시 말한다] <6> 모스크바와 상하이에서의 투쟁

입력
2012.04.06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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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돈·동지관계 '3중 시련'… 7년 망명 투쟁 얼룩으로 남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 9,334km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의 로망이다. 90년 전 죽산은 이 열차를 두 번 탔다. 1922년 알력 중인 두 공산당 그룹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의 연합을 위한 베르후네우딘스크(현 몽골의 울란우데) 대회에 참석했다가 모스크바까지 타고 갔고, 1925년 창당한 조선공산당의 밀사로 가면서 탔다.

필자도 10여 년 전 KBS와 서울신문 취재를 위해 두 번 탔는데, 앞서 이 길을 간 세 사람이 생각났다. 춘원 이광수, 몽양 여운형, 죽산 조봉암이었다. 춘원은 1914년 횡단열차를 탔던 경험으로 장편 <유정> 을 썼고, 1922년 죽산과 동행했던 몽양은 명문장의 여행기를 남겼다. 죽산만 기록이 없다. 그는 열차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필자는 최근 탈고한 죽산 전기의 이 부분을 춘원, 몽양의 글과 필자의 인상을 섞어 썼다.

상하이에서의 투쟁

1925년 죽산의 모스크바 밀행은 일제 관헌 자료나 당시 신문 잡지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모스크바에서 당시 죽산의 행적을 밝히는 생생한 자료와 사진들을 찾아내 공개했다. 죽산은 비단 천에 붓으로 쓴 조선공산당 전권대표 보좌역 위임장, 영문으로 된 고려공산청년회 전권대표 증명서를 휴대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해 두 단체의 승인을 받아내 임무를 완수한 그는 예기치 않은 성과를 얻어낸다. 자신의 모교인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입학 실링 21명 확보였다. 그의 아내 김조이, 아우 조용암, 소년시절 친구인 최경창이 포함되었다.

이해 11월, 조선공산당 조직은 총독부 경찰의 검거로 무너졌다. 박헌영 임원근 등 수십 명이 체포당했다. 이것이 1차 공산당 사건이다. 신분이 노출된 죽산은 귀국을 단념, 중국 상하이로 갔고 1932년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당할 때까지 7년 간 프랑스 조계에 머물며 망명 투쟁을 했다.

그는 여운형의 집에서 식객으로 지냈다. 김찬ㆍ김단야ㆍ권오설이 수사망을 피해 상하이로 탈출해 왔다. 그는 이들과 더불어 조선공산당 해외부를 만들고 두 가지 일을 벌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직과 6·10 만세 의거였다. 만주총국은 그의 몫이었다. 1926년 4월 하순, 두 명의 동지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만주로 갔다.

100만 만주 동포들의 삶은 참혹했다. 소작료를 내지 못해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몸을 다쳐 소작 토지를 얻지 못해 굶어죽었다. 그는 동포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비밀조직을 만들어 갔다. 그것은 수 년 후 만주 일대에서 일어난 항일 파르티잔 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김단야와 권오설은 순종황제의 국장(國葬)을 기해 6·10 만세 의거를 이끌었다. 조선공산당이 지휘한 사실이 드러나 대대적인 검거가 이뤄지고 배후 인물로 죽산의 이름이 신문에 크게 떠올랐다.

1926년 말,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고 일제에 투쟁하는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조선인 독립투사들도 유일당운동에 나섰다. 이념을 초월해 하나로 뭉쳐 일본에 저항하자는 것이었다. 죽산은 민족주의 진영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일에 앞장섰다. 공산주의나 민족주의나 조국 독립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는 방편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광복 후에도 좌우익 대립 속에서 연합전선을 만들려고 애썼다.

첫사랑 김이옥과의 결합

1927년 조봉암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칠 두 사람이 곁으로 다가왔다. 하나는 뒷날 '강화부인'으로 불린 첫사랑 김이옥, 또 한 사람은 30년 뒤 그를 죽음의 길로 밀어냈던 김동호(金東浩)였다.

죽산이 청년 시절 고향 강화의 잠두교회에 다닐 때 만난 김이옥은 경성여고보(현 경기여고)에 다니는 부잣집 딸로 함께 강화 3ㆍ1만세운동에 나섰다. 서로 사랑했으나 김이옥 집안의 반대로 결합하지 못했다. 죽산은 사회운동 후배인 동덕여학교 출신 김조이 양과 결혼했다. 이화학당 대학부에서 음악을 전공하던 김이옥은 폐결핵에 걸렸고 증상이 절망적으로 깊어지자 상하이로 그를 찾아갔다. 그의 아내 김조이는 모스크바공산대학에 유학 중이었다. 죽산과 김이옥은 동거에 들어갔고 1928년 딸을 낳았다. 그 따님이 지금 85세로 생존해 계신 조호정(曺滬晶) 여사이다.

김이옥은 6년 동안 곁에 있으면서 그의 투쟁을 도왔다. 죽산은 1927년 6월 한코우(漢口,지금의 우한ㆍ武漢의 일부)에서 열린 국제적색노동조합대회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했다. 1928년 코민테른이 일국일당주의를 내세우며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공산당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자 여운형 홍남표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 짱수성(江蘇省)위원회 산하에 한인 조직을 만들었다. 1929년에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 조직을 대체할 유호(留滬ㆍ상하이에 체류함을 뜻함) 한국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하는 데 앞장섰으며, 상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했다.

인생에서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는 법. 혁명가 후배인 본처를 버리고 김이옥과 동거하는 그를 동지들이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국내투쟁을 접고 중국공산당 조직을 붙잡고 상하이에만 머물고 있는 것도 불만이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총독부 경찰의 제압으로 1차당, 2차당, 3차당이 무너지고 거의 빈사 상태였다. 죽산은 조선공산당 깃발로써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중국공산당 상하이지부 서기를 맡고 있었으나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 동지들은 생명을 담보하고 국내 조직을 살리려 투쟁하고 있었다. 심지어 호적상의 아내인 김조이 여사도 국내에 잠입해 투쟁하다가 체포된 상태였다.

동지들의 비난은 공금 유용 시비까지 이르렀다. 죽산은 모프르(MOPRㆍ국제혁명운동희생자구원회)의 상하이 책임자로서 공금도 관리했는데 그걸 유용했다는 것이었다. 적색노조 한코우대회에 갈 여비가 없어 일부를 썼고, 사적으로 얼마를 썼는지는 기록이 없다. 망명투쟁을 하는 혁명가가 홀몸을 의탁하기도 힘든데 결핵을 앓는 아내와 딸이 있었으니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모스크바공산대학을 나와 그와 합류한 아우 용암(龍岩)이 전차감독을 하고 있었으나 그는 곤궁했다. 일제의 한 관헌자료는 그런 사정을 기록했다.

게다가 폭행사건도 일어났다. 죽산과 후배 동지들은 활동자금은커녕 신발이 닳아 떨어져 외출을 못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상하이 해관(海關ㆍ세관)에서 일하는 정윤교(鄭允敎)라는 동포가 돈이 넉넉해 보이는지라 독립운동 자금을 좀 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거부하자 집으로 찾아가 거의 협박조로 요구하다 현금과 귀금속 등 3,000원을 들고 나왔다. 정윤교는 민족주의 진영과 가까웠던지라 그 쪽에 호소했고 소문이 상하이 전체에 퍼져 버렸다.

김이옥과의 동거, 공금 유용, 정윤교 탈취사건은 멍에처럼 두고두고 죽산을 괴롭혔다. 8ㆍ15 광복 후 그가 조선공산당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밀려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김동호와의 만남

죽산 일가는 프랑스 조계에서 세를 얻어 살았다. 골목 안에 1,2층 주택을 벽을 붙여 짓고 복도 어구에 공용의 대문을 단 농당(弄堂)이라는 다세대 가옥이었다. 젊은 동지인 김동호가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 그는 본명이 양이섭(梁利涉), 양명산(梁明山)이라는 가명도 썼다. 뒷날 죽산에게 북한 공작금을 전달했다고 증언해 죽음의 길로 밀어 넣은 사람이다.

평북 희천 출신으로 배재고보를 중퇴한 그는 신의주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다 행랑에서 일본 벌목회사의 거액의 공금을 탈취, 독립운동 전선으로 온 청년이었다.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와 <독립신문> ,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지부에 그 돈을 기부했다.

눈이 서글서글하고 잘생긴데다 마음도 여리고 착했다. 죽산은 그가 상재(商材)에 뛰어나다고 판단해 장사에만 전념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사업 이윤을 공산당 조직에 몇 차례 내놓았다.

상하이 프랑스공원에서 체포되다

1930년대에 들어 일본이 상하이사변을 일으키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는 안전한 곳이 못 되었다. 도산 안창호, 여운형, 현정건((玄鼎健ㆍ소설가 현진건의 형) 등이 체포당하고 시시각각 위험이 다가왔다. 죽산은 가족을 두고 잠입했으나 결국 1932년 9월 28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프랑스공원에서 일본영사관 경찰과 프랑스조계 경찰에 체포당하고 말았다. 죽산은 그해 12월 3일 인천항으로 압송됐는데, 그가 한 때 기자로 일했던<조선일보> 는 비감한 문장으로 보도했다.

● 이미 보도한 상해 불조계(佛租界) 공원에서 검거되어 이래 한 달 동안을 그곳 일본 영사관 경찰에서 대략의 취조를 마치고 조선으로 보내게 된 조선공산당의 중진인 조봉암(曺奉岩)은 지난 삼일에 인천에 입항한 조선유선회사 기선인 경안환(慶安丸)으로 압송되어 왔다.

이른 아침 자욱한 안개는 바야흐로 새는 동편 하늘의 서광을 가리고 안개 속에 잠긴 해안의 전등 빛은 희미하게 쇠잔하려 하는 오전 여섯시 반 경에 인천 입항의 신호를 보내는 경안환의 기적소리가 소월미도(小月尾島) 밖으로부터 들리자 인천경찰서로부터 파송된 정사복 경관은 인천수상경찰서 앞 부근 일대를 경계하여 잡인의 통행까지 검사하는 자못 엄밀한 가운데에 조봉암은 오전 여덟시 반 경에 경관의 호위에 싸여 인천부두에 상륙되자 미리부터 등대하고 있던 자동차에 호송되어 그의 고향인 강화도를 뒤에 두고 풍우(風雨)같이 돌리어 경성으로 향하여 갔다.(조선일보 1932년 12월 4일자 7면)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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