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중목욕탕에서 겪은 일이다. 대여섯 살로 보이는 사내아이와 엄마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자신이 쓸 대야와 목욕의자를 챙겼고 아이는 선 채로 오줌을 쌌다. 엄마는 알아채기 못한 듯했다. 엄마는 비누칠을 했다. 그 사이 아이는 잽싸게 탕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아이를 향해 몇 번쯤 큰소리를 지르며 비누칠을 보다 빠르게 해치우는 것을 선택했다. 목욕탕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몇몇 손님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아이는 탕 속에다 침을 뱉었다. 엄마는 보질 못했다. 그때쯤 손님들은 아이가 정신지체아인 것을 알아차렸다. 엄마는 목욕에 갈급했던 사람처럼 쉼 없이 팔을 움직여 자기 몸을 닦았다. 아이는 몇 번이나 탕 속에서 넘어지며 위험한 고비를 넘나들고 있었다. 목욕탕의 손님들은 틈나는 대로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건사하느라 바빴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 지하철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 한참 동안 따지며 말싸움을 벌인다. 사람들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째려본다. 전화를 끊고서 그 여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갑자기 그 여자의 상식 밖 행동을 용서한다는 듯 걱정 어린 표정으로 변한다.
이럴 때 나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상식적으로 무엇이 옳은지를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상식에 대한 매뉴얼'이 우리 사회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공공장소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공공의 질서는 어떻게 유지돼야 하며 공직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오랜 세월 암묵적 합의로 이루어낸 매뉴얼이 우리에겐 없다. 몰상식에 대한 전례가 화려하다 보니, 공직자의 어지간한 몰상식과 비리는 화젯거리만 되고 만다.
선거철은 우리 사회의 온갖 몰상식을 가장 빛나게 드러내는 기간 같다. 교수가 표절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교수직을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정치인이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건재할 수 있는 사회, 실수였건 무지였건 선거법을 위반한 총선후보가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사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막장 사회. 어느 후보에게 혹은 어느 정당에게 나의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든, 지금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것은 어느 지경의 몰상식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지에 대한 실감일 것이다.
우리는 도덕 혹은 윤리 같은 말을 자주 오용하곤 한다. 우리가 도덕이나 윤리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실은 상식에 불과하다. 도덕과 윤리는 그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다. 현재까지 진행돼온 인간사에 큰 탈이 없는 행동은 '도덕적'인 게 아니라 '상식적'인 것이다. 미래를 염두에 둔, 보다 엄격하게 공공의 선(善)을 위해 다가갈 때가 '도덕' 혹은 '윤리'다.
상식에 대한 상식이 부재한 사회는 모든 것이 불행할 따름이다. 상거래는 어떠해야 하며, 공중도덕은 어떠해야 하며, 누군가가 무언가를 비판할 때는 어떠해야 하며, 몰상식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타인의 인권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며, 우리 삶의 터전은 우리들의 밥그릇은 어떻게 지켜내야 하며,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정당한 요구는 어떤 식이어야 하며, 각자의 직업에서 그 직업의 상식적인 자부심과 품위는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가. '좋게 좋게' 한 발씩 양보하며 넘어가야 옳는가. 대의를 위해 개인은 여전히 희생되어야 옳는가. '법적'인 대처까지 아니어도 '상식'적인 대처를 우리는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
우리사회는 상식에 대한 매뉴얼이 가장 간절하다. 잘못된 건 수정돼야 하며, 훼손된 건 복원되어야 하며, 빼앗긴 건 되찾아야 하고, 모든 침해로부터 개인은 지켜져야 한다. 아닌 건 아니다. 잘못인 시인되어야 한다. 공직자의 잘못은 시인을 넘어서 단죄돼야 하고 스스로 그 자격을 버리게 해야 한다.
지금을 '몰상식의 임계점'이라고 불러보자. 며칠 후면 선거가 치러진다. 상식적인 인간이 윤리적인 인간으로 보인다. 마음속에 정해둔 후보는 다만 상식적인 사람일 뿐인데, 큰 인재에게 투표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제발,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가 오기를.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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