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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애도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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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애도 없는 사회

입력
2012.04.04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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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은 대구에서 한 중학생이 같은 반 학생들의 지속적인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지 꼭 100일이 되던 날이었다. 처음 이 사건이 터졌을 때는 학교가 곧 아수라장이라도 된 것처럼 언론들은 난리를 쳤었다. 전문가의 진단에서부터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폭력의 실상을 폭로하는 기획기사, 그리고 정부당국의 매서운 대처를 요구하는 서슬 퍼런 사설까지 온 지면을 뒤덮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 100일을 기억하는 데는 참으로 인색했다.

몇몇 언론들만이 그의 죽음 이후 학교폭력에 대한 대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짧게 조명하였을 뿐이다. 그나마도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 이후 학교폭력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와 학교폭력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를 아주 짧게 보도했을 뿐이다. 어디 언론뿐인가. 정부당국이나 학교는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관련 단체들에서도 그 흔한 추모의 글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온 것이라고는 경찰이 '학교폭력근절 로드맵'이라고 발표하면서 4월안에 불량서클을 완전히 해체하겠다는 공언이었다.

어디를 보더라도 추모와 애도는 없다. 사실 내가 이 사건에서 가장 절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죽음 이후 지금까지 쭉 그랬다. 언제나 대책과 대책에 대한 비판이 하늘을 날라다졌지 목숨을 버린 그를 애도하고 통탄하는 글이나 행사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긴 "꽃이라도 한 송이 그 아이의 책상 위에 놓아두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교감이라는 분이 "그 아이를 영웅만들 일 있습니까"라고 답변하는 현실에서 100일을 맞이한 애도를 기대하는 내가 바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 수많은 대책들이 다 부질없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애도와 추모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학교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언어와 폭력에 대한 대책이 효력을 상실했음을 인정했어야만 했다. 우리가 대책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대책이 아니었음을 이 학생은 죽음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의 죽음이후 우리는 과거의 어떤 언어로도 그의 죽음을 설명하고 해명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학교와 학교 폭력에 대한 말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말을 잃어버린 존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침묵이다. 침묵하며 죽음을 비통해하는 것 말고 말을 잃어버린 존재에게 허용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울음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 없는 유가족들을 만난다. 그 유가족들의 얼굴을 마주대하는 순간 우리 역시도 말을 잊게 된다. 다만 비통함에 같이 젖어들 뿐이다. 우리가 학생들과 했어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학교폭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려면 어른들과 온 사회의 비통함에 그들이 초대되어 같이 애도했을 때이다.

이것은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생명교육'을 하고 '폭력예방교육'을 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애도에 동참한 사람에게서만 만들어지는 감각이다. 그러나 '애도 없음'의 우리 사회는 학생들에게서 그의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경험을 박탈해 버렸다. 충분히 슬퍼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폭력의 무서움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비통함에 젖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가버린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이처럼 애도 없는 사회는 가버린 학생에 대해서만 아니라 남아있는 학생들에게도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그들을 무감한 존재로 키우고 있다.

그를 상실한 것은 회복되지 않는다는 것에서 오는 이 비통함, 그것을 충분히, 그리고 집단적으로 수행하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다시 말을 할 수 있다. 그 말로 이뤄진 대책이라야 사람의 마음을 모으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진짜 대책이 된다. 그런데 이런 애도 없이 어떻게 감히 새로운 말이 나오고 그 말로 이뤄진 것이 어떻게 실효성이 있는 대책이 될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의 죽음 100일, 그의 죽음과 애도 없는 우리 사회를 애도한다.

엄기호 교육공동체 벗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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