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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 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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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연재소설 여울물 소리] 1. 이신통을 찾아서 <3>

입력
2012.04.0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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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사내의 실소를 뒤에 두고 마당을 돌아 나왔고 엄마가 부엌에서 찬모와 상을 차리다가 내게 말했다.

아까 내다보니 장사치나 관아치들은 아니겠고 뭣하는 사내들이래?

머 놀량패 왈짜가 아니랄까봐 곁말에 익살이 날아댕깁디다.

그런데 웬 상방을 내주었니?

고을 수리 어른과 약조가 있대나.

엄마가 내 말을 듣고 두리번거렸다.

아이들 둘은 불러야 되겠네. 바쁘면 너하구 나두 들어가구.

나는 뻔히 알면서도 뾰로통하며 말했다.

시집보낸다며? 막사발이지만 이렇게 마구 내돌리면 안 깨지구 배길까?

이년, 함부루 말 마라. 니가 청자 접시지 왜 막사발이여. 재간을 아끼면 오히려 팔자 사나워지느니.

엄마가 육포와 탕평채며 수육, 배춧속, 양념을 올린 쟁반을 내게 내밀었고, 그녀는 잘 거른 청주를 가득 채운 주전자와 술잔 등속을 또한 쟁반에 받쳐 들고 겨드랑이에 둘둘 말린 백지를 끼고 상방으로 갔다. 우선 엄마는 툇마루에 쟁반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서서 반절을 하며 말했다.

주모 월선이 문안드리오.

평안하신가.

예, 미리 약조를 받지 못하여 모든 준비가 미흡하더라도 용서하십시오.

부랴부랴 교자상을 펴고 상 위에 끼끗한 백지 덮고 안주와 술을 늘어놓은 뒤에 세 사내의 술잔에 술을 치면서 엄마가 말했다.

처음 오신 손님이라 쇤네 장유유서의 분별이 없으니 허물치 마소서.

하고는 주전자를 들어 오른쪽으로 삿갓 벗은 맨 상투부터 갓과 패랭이의 차례로 술을 따랐다. 셋은 술을 일제히 들이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연배 순으로 맞게 잔을 돌렸으니 주모의 눈썰미가 대단하오.

패랭이가 방문 가에 앉아 있던 나를 한번 돌아보고 씩 웃으며 말했다.

헌데 저 처자는 누구요?

예, 제 딸내미입니다. 듣자 하니 손님들 익살이 장하다구 합디다?

패랭이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날씨가 하 을씨년스러워 허튼소리 몇 마디 했다가 처자에게 되우 당했소이다. 이분은 충청도 사는 내 형님인데 산 보러 다니는 분이시고, 이 사람은 소리꾼인데 나이는 나보다 위요만, 초라니 방정이라 동무 삼아 데리고 다니는 처지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누가 초라니 아니랄까봐 소리꾼의 자진모리가 나온다.

허 고얀 놈 봐라! 채마밭에 물똥 싸고, 우는 놈 발가락 빨리고, 똥 누는 놈 주저앉히고, 곱사둥이 뒤집어놓고,

그만해 그만해, 신명은 이따 내고.

패랭이가 그리 말하였건만 소리꾼은 기왕에 내지른 김이라 계속한다.

애 밴 부인 배를 차고, 길가에 허방 놓고, 옹기전에 말 달리기, 비단전에다 물총 놓고, 이놈 니가 삼강을 아느냐 오륜을 아느냐. 이런 모진 놈이 세상에 어디 있더란 말이냐.

엄마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놀부는커녕 해사하니 글방 도령 같은데 그 손님은 뭣하는 분이셔?

글방 도령 같다는 말엔 나도 웃고 좌중이 다 웃는데 패랭이는 얌전하게 대꾸했다.

침도 놓고, 약도 짓고, 재담도 하고, 책도 읽어드리고, 책 베끼는 서사 노릇도 하우.

소리를 배우슈, 책 읽기야 요즘은 촌 노인네들이나 아낙들이 좋아하지. 자아, 기녀 아이들 몇 불러들이리까?

엄마도 덩달아 신을 냈고 산 보러 다닌다는 풍수쟁이가 말했다.

우리는 전주나 하고 기다릴 테니, 이따가 후래자가 오면 진안주 내오고 나서 부르시게. 술 한 주전자 더 내오고.

악사는 어찌하오리까?

초라니 방정 소리꾼이 대꾸했다.

이런 자리에 삼현육각을 바라겠우? 젓대 하나, 해금 하나면 되겠구먼. 북 장구야 우리가 거들면 되고.

우리 딸이 가야금을 제법 뜯는다우. 그럼 천천히 전주나 들고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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