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사람들이 바람 부는 스산한 광주의 길거리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걷고 있다. 1992년 12월 대선 직후 한겨레신문에 실린 박재동 화백의 한 컷 만평은 호남 사람들의 마음을 이렇게 그렸다. 김대중 민주당 후보에 90% 넘는 몰표를 던졌지만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 무려 193만여 표나 뒤진 대선 결과는 그들에게 절망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호남이 김대중에게 268만 표를 더 주었어도 인구가 훨씬 많은 영남에서 무려 405만 표나 진 현실은 넘어설 수 없는 '불가능의 벽'이었다.
이런 지역주의 몰표가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67년 6대 대선 때 호남은 재선에 도전하는 공화당 박정희 후보에 104만 표를, 신민당 윤보선 후보에 113만 표를 주었다. 그때 호남인들은 박정희를 '경상도 대통령'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영남이 박정희에게 윤보선보다 136만 표나 많은 226만여 표(65.7%)를 몰아주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71년의 7대 대선도 그랬다. 신민당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운 목포 출신의 김대중이 나섰는데도 전남은 34.4%, 전북은 35.5%의 표를 박정희에 주었다. 반면 경남은 73.4%, 경북은 75.6%를 박정희에 몰아주었고 야도(野都)였던 부산은 박정희 53.5%, 김대중 44.4%라는 탈지역적 투표경향을 보였다. 서울에서는 김대중이 119만여 표(59.4%)를 얻어 80만여 표(40.0%)에 그친 박정희를 압도했다.
이 선거 결과에 위기감을 느낀 박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제정, 장기집권의 길을 걷는 바람에 대통령 직선제는 16년이나 지난 뒤에야 가능하게 됐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혈투가 벌어진 87년 13대 대선은 나라 장래가 걱정될 정도의 지역주의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김대중 후보만 놓고 보면, 그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광주 94.4%, 전남 90.2%, 전북 83.5%로 호남에서 몰표를 받지만 부산 9.1%, 대구 2.0%, 경남 4.5%, 경북 2.0% 등으로 영남에서는 호남 이주민을 제외하면 사실상 표를 거의 받지 못했다.
6, 7대 대선에서 별로 나타나지 않았던 지역주의가 왜 이리 심해졌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영남 우선 개발과 인사 차별 두 가지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집중과 효율의 논리'를 내세워 공업단지, 고속도로, 철도 복선화를 영남에 집중했다.
호남인들은 호남선의 단선을 타면서 차별을 실감했고, 10년이 지나도 공장 하나 세워지지 않는 허름한 들판에 비감함을 느껴야 했다. 인사는 호남인들의 마음을 더욱 멍들게 했다. 당시 '호남 사람은 공직에서는 과장까지, 기업에서는 부장까지'라는 말이 정설로 통했고, '서울에서 목욕탕 때밀이와 파출부는 전라도 사람'이라는 자조가 떠돌았다. 호남은 천형(天刑)의 땅이었다.
이런 지역주의와 차별의식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해 상당 부분 희석됐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지역화합과 탕평의 인사를 했다면 지역주의는 점차 약해졌을 것이고, 특히 SNS의 젊은 세대가 중심이 될 때는 유물이나 박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국민들은 그가 지역에 얽매이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자수성가한 데다 세계를 상대로 뛴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위대한 화합의 지도자로 가지 않고 고향인 영일ㆍ포항 사람들만 믿고 사찰을 맡기는 왜소한 선택을 한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호남인들은 '충성심이 담보되지 않은 호남 인사, 교체하는 게 바람직함' '출생지는 서울이지만 부모의 고향이 호남이라는 소문이 있음'이라는 사찰 기록의 한 대목에 분노와 처참함을 다시 느끼고 있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반민주적 작태도 근절해야 하지만, 나라에 충성해야 할 공직자를 정권에 대한 충성심으로 재단하는 치졸한 짓은 이제 끝내야 한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지역주의에 매몰돼서는 절대 안 된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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