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토크쇼에 나온 연예인이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상처와 치부를 눈물과 함께 드러내고, 팍팍한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는 '심리 치유 에세이'가 서점가를 휩쓸고 있다. 힐링(healingㆍ치유)의 시대다. 대중의 관심이 소박하지만 따스한 위로를 전하고 잠시나마 함께 눈물 지으며 카타르시스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콘텐츠에 쏠린다.
공연계도 예외가 아니다. 어리석은 인간 군상이 등장하는 코미디가 대세를 이뤘던 소극장 연극이나 주로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뮤지컬계에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다.
공연 소재로 부상한 '평범한 삶'
6일부터 15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서글퍼도 커튼콜'은 지난해 11월 초연 이후 다시 선보이는 무대다. 한국공연예술센터가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 작가를 지원해 제작한 지난해 '봄 작가, 겨울 무대' 프로젝트 4편 중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카페 커튼콜에서 은둔형 외톨이로 지내는 반지와 카페를 찾은 정란이 셰익스피어 희곡 등으로 연극놀이를 하며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용서하게 되는 내용으로, "관객과의 정서적 교감이 높다"는 게 최우수작 선정 이유다. 초연 당시 관객들은 "고단한 연극도 커튼콜은 빛나야 하듯 서글픈 인생도 수고했다 박수 받아야 한다"는 극중 대사에 크게 공감했다. 평안과 치유가 문화 콘텐츠의 주요 트렌드가 되면서 평범하거나 어느 사회 집단에도 속하지 못한 주변인이 본격적인 공연 소재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리텔링보다 내면 묘사가 핵심
힐링 공연들의 특징은 극적인 이야기 전개보다 등장인물의 내면 묘사에 더 무게를 둔다는 데 있다. 15일까지 충무아트홀 소극장 블루에서 공연되는 연극 '아내들의 외출'은 한국행 비행기를 놓친 엄마와 딸, 며느리가 낯선 외국의 공항 대합실에서 보내는 1박2일을 그린다. 독백과 대화를 통해 세 여자의 마음의 병을 들여다 보는 게 주된 내용이다.
이 작품은 원래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한 문화 행사로 마련했다. 2010년, 2011년에 60분 분량으로 선보였고 이번 공연은 연극적 완성도를 높이고 시간도 90분으로 늘려 학회 행사가 아닌 대중연극으로 첫 선을 보이는 무대다. 작품을 기획한 박민희 플래너코리아 대표는 "연극은 사유하게 하는 힘이 있어 마음의 병을 표현하기에 효과적인 예술 장르"라며 "하반기 공연을 목표로 중년 남성의 상처를 다룬 '목요일의 남자들'(가제)도 기획 중"이라고 밝혔다.
화려함 벗고 나를 돌아보게 하는 뮤지컬
최근에는 화려한 쇼의 성격이 강한 뮤지컬계에도 힐링 바람이 불고 있다. 29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판소리 소재 뮤지컬 '서편제'에는 "치유와 감동의 공연"이라는 관객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특히 송화가 토해 내듯 '심청가'의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을 5분여 이어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많다. 연출가 이지나씨는 "씻김 제의 안무를 넣고 모든 감정을 마지막 장면을 향해 몰아간 것은 근대화에 희생된 우리 것에 대해 양심의 빚을 진 모든 한국 관객이 치유 효과를 경험하도록 연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나 스스로도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내 본질에 관한 치열한 물음에서 오는 통곡과 치유 받는 평온함을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대학로 아트원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지난해 10월 시작해 올 1월 말 막을 내릴 예정이었으나 관객의 호응 덕에 종연일이 오는 29일로 미뤄질 만큼 인기가 높다. 무대전환 없이 100분간 두 명의 배우가 이끌어 가는 작품으로 "두 주인공 토마스와 앨빈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돌아보게 됐다"는 관람 후기가 줄을 잇는다. 2010년 한국에 처음 소개된 라이선스 공연이다. 2009년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에도 "미니멀한 공연인데도 가슴 먹먹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다.
동정과 연민에 그치는 범작 양산 우려
이처럼 힐링 공연이 각광 받는 것은 영화나 TV드라마와 달리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는 신파 콘텐츠로 여겨 다소 배척해 왔던 그간 공연계 흐름에 비춰보면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하지만 걱정의 목소리도 있다.
연극평론가 김성희씨는 "관객의 의식을 깨우쳐 현실 모순에 맞서 싸우게 하는 작품뿐 아니라 눈물과 카타르시스를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게 하는 공연도 다양성 차원에서 존중돼야 한다"며 "다만 개인의 상처를 다루는 작품은 작가가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성숙한 주제 의식을 담지 못할 경우 자칫 슬픈 소재에 빠져들어 동정과 연민에 그치는 범작을 양산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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