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은 죽산에게 광휘에 찬 시간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간은 세 번 있었는데 그 중 두 번은 광복 후였다.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토지개혁의 대업적을 쌓은 1948년, 그리고 대통령선거에서 216만 표를 얻은 1956년이다. 일제 강점기만 따지고 본다면 1925년을 전후한 시기가 가장 빛났다. 전국 순회 강연의 최고 연사, 조선일보 기자, 조선공산당 창당 주역 중 한 명, 조선공산당 승인을 받기 위한 모스크바 행 밀사, 이런 것들이 이때 이뤄졌다.
청년 공산주의자 조봉암
1923년 여름 폐결핵에 걸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중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죽산은 한 발 앞서 귀국한 김찬과 합류했다.
도쿄 유학시절 그를 공산주의로 이끌었던 김찬은 1922년 여름, 죽산을 비롯한 사회주의자 후배들에게 실천적 참여를 위한 유학 중단과 귀국을 권유하고 자신은 소련으로 가 머물렀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활동했으므로 모스크바에서 유학한 죽산과 조우하진 못했다.
그러다 몇 달 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입국해 조선공산당 창당 준비 작업을 은밀히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코민테른의 산하 조직인 코르뷰로(고려부)의 국내부와 청년뷰로(청년부)를 조직한 터였다. 그는 신사상연구회라는 간판을 걸고 합법을 가장해 활동하고 있었다. 김찬보다 조금 늦게 역시 소련에서 지령을 받고 귀국한 신철(申鐵)과 김재봉(金在鳳)은 지하에 숨어 그를 도왔다.
신사상연구회 멤버들은 연구회 참여를 거부하는 서울청년회, 북성회와의 관계를 조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 판국에 돌아온 죽산은 김찬의 오른팔 노릇을 톡톡히 하기 시작했다.
가을 들어 죽산은 합법적 단체인 신사상연구회와 비합법적 단체인 청년뷰로에서 구성원들과 안면을 넓혀가며 서서히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는 본명 대신 박철환(朴鐵丸)이라는 가명으로 불리웠다.
박철환이라는 가명은 일본 유학시절에 지었다. '철환'은 말 뜻 그대로 총탄이다. '우리는 이미 조국 해방을 위한 전선에 나선 전사다. 탄환이 한 발밖에 없다고 해서 안 쏠 수는 없다'는 뜻을 가진 가명이었다. 그는 바꿀 '환'을 넣은 철환(鐵煥)이라는 가명도 썼다.
1924년 초 탁월한 젊은 공산주의자들인 박헌영(朴憲永) 임원근(林元根) 김단야(金丹冶)가 신의주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3인은 두 해 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재 상하이 고려공산당 결성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연맹을 창립한 일로 '삼인당' 혹은 '상하이 트로이카'로 불리고 있었다. 지난해 4월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기 위해 함께 입국하려다가 체포당해 투옥됐다 함께 출옥한 것이었다. 셋 중 가장 존재감이 큰 것은 박헌영이었다.
죽산은 국내파 공산주의 청년투사의 상징인 3인과 어깨를 겨룰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제 화술에 능통해 있었다. 박헌영에게 자신이 일본 유학 시절 홍순복 이성구 김찬과 엿장수를 하며 고학한 이야기와 서대문 감옥 이야기를 꺼내 호감을 샀다. 박헌영이 홍순복 이성구와 더불어 경성고보 3·1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구속돼 자신과 같은 시기 서대문감옥에 갇힌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임원근과 김단야는 그가 다닌 세이소쿠영어학교의 동문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로 노는 물이 같으면 이리저리 인맥으로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삼인당'은 죽산을 첫날부터 동지로 대했다.
2월에 죽산과 그의 동지들은 청년뷰로의 합법적인 공개조직 신흥청년동맹을 결성했다. 동맹의 첫 사업으로 대중적인 지지 기반 확보를 위한 전국 순회 강연을 계획했다.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회하는 서조선대(西朝鮮隊)는 박일병(朴一秉)과 죽산, 경상도를 순회하는 남조선대(南朝鮮隊)는 김찬과 신철, 박헌영이 연사로 결정됐다.
죽산은 3월 16일부터 황해도 해주ㆍ재령ㆍ안악ㆍ황주, 평안도의 평양ㆍ안주ㆍ박천을 돌며 연단에 섰다. 그와 함께 간 박일병은 그보다 여섯 살 위였는데, 오성(五星)학교,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일본 역사와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동아일보 논설반 기자를 지냈고 신사상연구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순회 강연 주체인 신흥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이기도 했다. 죽산의 강연은 그를 능가했다. 젊은 청중들은 그의 말에 웃고 탄식하고 눈물을 흘렸다.
순회 강연 중 좋은 일도 생겼다. 경성여자고학생상조회와 제휴해서 황주 강연을 같이 했는데 상조회 회원인 동덕여학교 출신 김조이(金祚伊) 양과 서로 호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강연이 끝난 뒤 열린 총화에서 김조이 양이 눈을 깜짝이며 물었다.
"공산주의가 부르주아지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연민과 애정에서 출발했다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레닌이 혁명과정에서 독재를 용인한다고 말했다는데 그게 서로 모순되지 않나요?"
죽산은 신념에 찬 얼굴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레닌 동지의 글, 에 있는 말입니다. 나는 레닌 동무 신봉자이지만 그 말은 반대합니다. 부르주아 독재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반대합니다. 우리 조국이 독립한다면 인민의 평등과 권익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나라이어야 합니다."
여자고학생상조회원들은 존경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4월 19일, 성공적인 순회 강연을 결산하는 강연을 인천에서 열었다. 죽산은 김조이와 나란히 강연을 했고 사랑도 깊어졌다. 5월 말 두 사람은 김조이의 고향집 경남 창원에서 혼례를 올렸다.
결혼 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했고 9월에는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신사상연구회 멤버였던 홍증식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이곳저곳 강연에 불려 다녔다. 심지어는 산아 제한 토론회에도 불려 나갔다.
11월에 신사상연구회는 명칭을 화요회(火曜會)로 바꾸고 종래의 연구중심 활동에서 행동중심 단체로 체질을 개선하기로 의결했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것에 착안하여 그렇게 고친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에 주도적 역할
1925년 2월 죽산과 화요회 멤버들은 김재봉의 집에 모여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자대회를 거의 동시에 열어 경찰의 관심을 그 쪽으로 돌리고 창당을 하자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4월 15일 중앙기독청년회관에서 기자대회가 개막됐다. 조선인 기자 700여 명이 억압을 뚫고 일어서겠다고 외치는 판이라 경찰은 긴장하여 여기에 온 정신을 쏟았다.
대회 마지막 날인 4월 17일 오후, 참석 기자들은 동대문 밖에 있는 손병희 선생의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하지만 조선일보 기자 죽산은 거기 없었다. 역사적인 조선공산당 창당을 위해 20여 명의 공산주의 동지들과 황금정(黃金町ㆍ현재의 을지로)의 중국 요릿집 아서원(雅敍苑) 2층에 앉아 있었다.
먼저 김재봉이 '오늘 모임은 공산당 조직을 논의하려는 것'이라고 개회 선언을 했다. 사회자로 지명된 김약수는 공산당 결성의 필요성을 재강조한 뒤 일동의 의견을 물었다. 전원 찬성을 표시하매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죽산은 김찬 조동우(趙東祐)와 함께 간부 선출의 전권을 행사하는 전형위원으로 선임됐다.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가 끼이지 않은 것은 기자대회에서 자리를 지켜 경찰이 낌새를 차리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당의 결성만큼이나 중요한 공산청년회 조직의 핵심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훈정동 박헌영의 집에 10여 명이 모였다. 공산청년회 결성 모임이었다. 죽산이 사회를 맡았고 박헌영에게 개회사를 부탁했다. 박헌영의 발언이 끝나자 죽산은 그것을 부연하여 공산청년회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해 찬성과 동의를 얻어낸 뒤 선언했다.
"그럼 우리들의 결사(結社) 명칭을 고려공산청년회로 정하기를 제안합니다."
그는 김단야에게 미리 준비한 강령과 규약을 낭독하게 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곧이어 열린 간부 선출에서 임원근 권오설 김단야 김찬 홍증식 조봉암 박헌영 등이 중앙집행위원으로 뽑혔다. 경찰의 시선을 따돌리고 이틀 동안 신속하고도 주도면밀하게 결성된 두 단체에서 그는 핵심 속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그에게는 또하나의 중요한 사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뒤 김찬의 집에서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는 레닌 정부와 코민테른 본부의 조선공산당 승인을 얻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조동우를 대표로, 죽산을 부대표로 지명했다. 그리고 박헌영의 집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도 그를 정식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조동우와 조봉암, 두 사람 모두 책임감과 돌파력이 강하고 모스크바 사정에 능통한 터라 뽑힌 것이었다. 두 해 전 처음 모스크바에 갈 때처럼 각자 출발이었다.
"내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는 건 조국 독립의 길이기 때문이야." 죽산은 아내 김조이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 다시 먼 여정에 올랐다.
이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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