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혹과 기만/ 피터 포브스 지음ㆍ이한음 옮김/ 까치 발행ㆍ360쪽ㆍ2만원
문어는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이다. 그런데도 바위 근처에 있으면 바위 색깔로, 모래바닥을 지날 땐 황토색으로 주변 환경에 맞게 자신의 피부색을 바꾼다. 색맹인 문어가 어떻게 위장술을 쓸 수 있는 걸까.
그 답은 백색소포에 있다. 문어의 피부에 있는 이 생체물질은 일종의 반사판이다. 주위에서 온 빛을 그대로 반사시켜 문어의 피부색을 주변 환경과 같게 만든다.
문어는 또 변신술의 귀재다. 독을 지닌 쏠배감펭과 바다뱀 흉내도 제법 잘 낸다.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자기 모습을 독이 있는 종(種)처럼 바꾸는, '베이츠 의태'라 불리는 전략이다. 피부에 난 돌기도 한몫 거든다. 문어는 돌기를 뾰족하거나 둥그스름하거나 매끄럽게 만들 수 있어 따개비로 뒤덮인 돌의 질감부터 물고기의 매끄러운 피부까지 모두 따라할 수 있다.
아프리카 남부 사막에 사는 에레미아스 루구브리스 도마뱀 역시 문어와 같은 전략을 쓴다. 이 도마뱀은 어릴 때 피부색을 검게 하고 등을 굽힌 채로 뻣뻣하게 걷는다. 독을 지닌 우그피스터 딱정벌레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꼬리 부분은 사막의 모래와 비슷한 황갈색으로 바꿔 교묘히 감춘다.
이외에도 자연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기만술은 뮬러 의태와 기억자극 의태가 있다. 뮬러 의태는 포식자가 맛이 없다고 여기는 먹잇감처럼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고, 기억자극 의태는 포식자에게 두려움을 주는 동물처럼 자신을 꾸미는 전략이다. 가령 검은색과 노란색 띠무늬를 가진 곤충이 많은 이유는 새가 말벌에게 갖는 두려움을 이용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영국 런던퀸메리대에서 연구원을 지낸 언론인 피터 포브스가 쓴 <현혹과 기만> 은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기만술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하나 둘 풀어간다. 저자는 특히 전쟁에서 비슷한 책략이 많이 쓰였다고 설명한다. 현혹과>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장군 롬멜에게 패배를 안긴 버트램 작전이 대표적이다. 때는 1942년 10월 롬멜과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이 이끄는 전차부대가 이집트 서부 사막에서 만났다. 영국군은 깜깜한 밤을 틈타 전차를 이동시킨 뒤 원래 전차가 있던 자리에 가짜 전차를 세워뒀다. 독일 정찰부대는 이를 파악하지 못했고, 롬멜 장군은 어느 쪽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양쪽 모두 진짜라고 생각한 그는 부족한 군대를 둘로 나눴는데, 저자는 그것이 결정적인 패인이 됐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또 1900년대 초반, 파리 시내를 지나는 위장 트럭을 본 피카소가 "맞아, 저걸 만든 게 바로 우리야. 저게 입체파야"라고 말한 사례를 들며 군부대의 위장을 처음엔 화가들이 주도했다고 설명한다. 실제 대상을 부분별로 다르게 색칠한 입체파 화가들의 그림은 위장복을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을 뿐더러 화가들이 직접 위장복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책은 의태와 위장이 예술, 전쟁, 과학을 넘나들며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다만 의태와 위장의 역사를 비교적 최근인 현대사에서만 풀어낸 점은 아쉽다. 영국 워릭대가 2년마다 한 번씩 수여하는 워릭 저술상을 지난해 받았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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