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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iew/ 키코 악몽… 어젯밤도 가위눌린 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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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View/ 키코 악몽… 어젯밤도 가위눌린 김사장

입력
2012.03.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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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여가 지났다. 그간 시름시름 앓다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된 곳도 있고, 지금껏 병마와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곳도 있다. 키코(KIKO)가 남긴 상처는 그만큼 깊고 또 컸다.

"앞으로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전화기 너머로 전해져 오는 경남 창원 T사의 김모(64) 사장의 한숨소리로 그간의 깊은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대기업에 전자부품을 납품하는 회사를 설립한 게 30여년 전. 은행에 단 한 푼의 빚을 지지 않는 무차입 경영을 할 정도로 탄탄한 회사였다.

키코는 김 사장에게서 30년 이룬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2007년6월 한 외국계은행에서, 또 이듬해 3월 다른 시중은행에서 키코 상품에 가입했다. 대기업에 제품을 납품하고 받는 달러에 대해 환헷지(환율변동위험 해소)를 해야 된다는 은행 직원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내려갈 거라던 환율은 마구 치솟았고,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렇게 떠안은 빚이 150억원. 연간 순익이 10억~20억원 수준인 중소기업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은행에 가서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으르기도 하고 달래도 봤지만 키코 상품은 일단 가입하면 해지도 안 된다는 거에요.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불어나는 손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어요."

자식보다 더 귀하게 일군 사업을 접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또 200명 가까운 종업원들의 생계는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뛰었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개인 재산까지도 모두 쏟아 부었다. 그는 "벼랑 끝으로 밀려 떨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했다.

최악의 부도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키코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은행들의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패스트트랙)으로 원금 상환은 유예를 받고 있지만, 매월 갚아나가야 하는 이자만 8,000만원, 연간으로 9억원이 넘는다. 1년간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을 고스란히 이자 갚는데 쓰고 있는 셈이다. 현재 2심이 진행중인 재판에서 패소한다면 원금도 다 떠안아야 할 몫이다. "그래도 이젠 회사 자산을 다 팔면 빚은 갚을 수 있는 상황이 됐으니 문을 닫아도 신용불량자로 전락하진 않겠죠. 하지만 앞으로 몇 년을 더 키코와 씨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피해기업들의 고통은 지속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키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가고 있다. 키코 피해기업들이 모여 만든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 가입사는 242곳. 공대위에 가입하지 않은 곳까지 합하면 실제 피해 중소기업은 700곳이 훨씬 넘는다. 은행과의 거래에서 철저히 '을(乙)'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기업들이 피해 사실을 숨기고 있는 탓이 크다. 이들 중 50곳 넘는 기업이 이미 부도나 폐업 처리가 됐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기업이 추가로 문을 닫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공대위 김화랑 사무차장은 "그래도 초창기에는 언론 등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줬지만 이제는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피해기업들만 외롭게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무엇보다 분개하는 것은 정부도 법도 그들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석유화학 관련 제품을 수출하는 W사 탁모(53) 대표는 은행 직원에게 불과 25분 설명을 듣고 얼떨결에 키코 상품에 가입했다가 30억원 넘는 손실을 봤다. "처음에는 은행을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금융당국이 어느 정도 책임을 질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저 뒷짐만 지고 있더군요. 법원과 검찰도 힘 센 곳들의 편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행 역시 차가웠다. 지난해 탁 대표가 엔고(高) 때문에 높아진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른 은행 엔화 대출금을 일부 상환하려고 했지만, 키코를 판매한 은행 측이 공문을 보내 대출 상환을 저지한 것. 자행 대출을 먼저 갚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불어나는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는데 너무 매정한 것 아닙니까. 혹시 법적인 책임이 없다고 한들 그래도 키코를 판매한 은행들은 최소한 도의적인 책임은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죠." 그들에게 키코가 가져다 준 상처는 단지 금전적인 손실 만이 아닌 듯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도 허사… 1심 "키코상품 불공정 아니다"

'2008년 9월10일 1달러 당 1,101.0원에서 한달 후인 10월10일 1달러에 1,420.3원.'

환(換)헤지 파생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한 중소기업들이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원ㆍ달러 환율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원화 강세였던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 키코에 가입한 중소기업들에게 피해가 집중됐다.

수출 기업은 수출 대금을 외화로 지급받는 대신 재료비 등은 원화로 지출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원화 강세 시 수익성이 악화한다. 이런 손실을 회피하기 위해 탄생한 금융상품이 키코다.

키코는 은행과 기업이 환율 변동폭의 상ㆍ하단을 정해 놓고 그 구간 안에서 환율이 움직이면 미리 약정한 환율로 외환거래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상품인데 금융위기로 원화가치가 폭락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가입 기업들이 계약금액의 2, 3배로 치솟은 달러를 시장 가격에 사들여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은행에 팔아야만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키코 가입 손실로 느닷없이 부도와 폐업 위기에 몰린 200여개 중소기업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008년 11월 법정 싸움을 시작했으나 5년간의 성적은 처참하다.

법정에서 기업과 은행간 쟁점은 크게 ▦키코가 불공정 계약인지 ▦은행이 설명의무ㆍ적합성의무를 위반했는지 여부다.

재판은 2010년 11월 1심 판결을 거쳐 현재는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진행 중이지만 지금껏 나온 판결을 보면 법원은 공통적으로 핵심 쟁점인 불공정 계약 논란에 대해 "키코는 공정한 계약"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환율 변동성에 대해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모델은 없을뿐더러 키코는 환율이 일정 범위에 있으면 기업이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상품이므로 구조적으로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재판부 요지다. 기업과 은행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부분에서 법원이 사실상 은행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다만 법원은 일부 중소기업에 대해선 은행이 개별 기업의 여건에 적합하지 않은 상품을 권하거나 설명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투자를 결정한 기업의 책임도 있다는 전제 하에 배상액은 손실의 10~50%로 제한했다. 이 정도라도 이기려면 기업이 은행의 잘못을 찾아 증거로 인정 받아야 한다. 게다가 은행이 판결에 불복해 항소(2심), 상고(3심)하는 통에 대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뒤집히지 않아야만 비로소 배상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이처럼 힘든 법정싸움 탓에 처음 소송에 참여했던 200여개사 중 70여개사는 이미 항소를 포기했다.

민사 소송과는 별도로 키코 공동대책위원회는 2년 전 KB국민과 신한, 우리, 하나, 외환, 경남, 산업, 씨티, HSBC, JP모건, SC제일 등 은행 11곳의 임직원 90여명을 사기 혐의로 고소ㆍ고발했지만 이 사건도 무혐의 처분 났다. 검찰은 1년 반 가까이 수사한 끝에 지난해 7월 "금융위기 전에는 키코를 사들인 기업이 오히려 이득을 봤고, 재판에 넘기더라도 유죄 선고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업이 키코로 손해를 본건 예상치 못한 금융위기 탓이지 키코 상품 자체의 치명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피해 기업들은 바로 서울고검에 항고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강아름 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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