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장 한푼이 급한데…" 정부 구제금 받기까지 최소 3~4개월
한 때 줄을 서서 먹을 만큼 유명했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인도요리전문점에는 먹다 남은 컵라면과 쌀, 전기장판, 이불, 옷가지가 널려있었다. 베테랑 인도 요리사들의 솜씨로 TV에도 여러 번 소개됐던 곳이다. 하지만 채무에 시달린 사장이 가게 문을 닫고 잠적하면서 요리사 4명만 덩그러니 남았다. 벌써 6개월째다. "오피스텔 보증금을 빼서 밀린 임금을 주겠다"는 사장 말에 속아 숙소로 쓰던 오피스텔마저 나온 그들은 식당 바닥에 전기장판 한 장을 깔고 지난 겨울을 났다.
이 식당에서 가장 오래 일한 요리사는 사이드 칸(Said Khanㆍ34)씨. 홀어머니와 누나 여동생 2명, 부인과 어린 자녀 3명까지 8명의 식구를 혼자 먹여 살려야 했던 칸씨는 2008년 초 한국행을 택했다. 그는 인도 뱅갈로의 유명 호텔에서 15세 때부터 실력을 쌓은 15년 경력의 요리사였음에도 처음 6개월은 '훈련 기간' 이라며 무급으로 일하고 이후 9개월은 월 50만원만 받고 일했다.
근무 시간은 살인적이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는 이 식당에서 일하고, 그 후에는 같은 건물에서 사장이 운영하던 술집에서 새벽 3시까지 일했다. 외국인등록증과 여권을 사장에게 빼앗긴 채 만 3년 간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시간당 최저 임금만 적용해서 계산해도 그가 지난 3년10개월간 받지 못한 임금과 퇴직금은 6,254만3,960원이다.
2년 동안 일한 셰이크 따히르(28)씨와 셰이크 찬드(27)씨도 각각 3,760여만원, 3,500여만원, 1년간 일한 셰이크 나지르(34)씨도 1,380여만원이 체불됐다. 모두 칸씨처럼 인도의 호텔에서 요리사로 일하다 가족 생계를 위해 한국에 와 밤낮으로 일만 하고 돈은 대부분 떼였다.
하지만 더 막막한 사실은 사장이 가게 문을 닫은 지 6개월이 넘도록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는 구제절차였다. 이미 지난해 관할 지방노동청에 임금체불 진정을 넣고 근로복지공단이 주는 긴급 구제 자금인 체당금도 신청했지만, 1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체불임금이 얼마인지 확정하기 위한 노동청의 조사에 식당 사장이 불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체당금을 받으려면 기업이 재판상 혹은 사실상 도산해야 하는데, 이 식당은 도산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 담당 근로감독관은 "식당 사장이 폐업신고를 하지 않았고 영업재개 가능성이 있어 도산 여부는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며 "사장은 연락이 닿지 않아 지명통보를 해 놓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체당금은 사업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을 긴급하게 보호하기 위한 제도지만 이렇듯 지급요건이 까다롭고 진행 절차가 오래 걸려 긴급 구제라는 취지가 무색할 지경이다. 사업주와의 근로계약 관계를 확인하고 체불임금을 확정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체불임금이 확정되더라도 기업이 도산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돈을 받을 수 없다. 이렇다 보니 전체 체불임금 대비 체당금 지급액은 20%에 불과하다. 또 체불임금 진정 처리기한은 법적으로 25일 이내이고 체당금은 청구일로부터 30일 내에 지급하도록 고용노동부 내규로 정해져 있지만, 체불임금 확정부터 체당금 지급까지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짧아도 3,4달 길면 1년 가까이 걸린다.
박문배 노무법인 비젼 노무사는 "사업주가 도망가 지난해 7월에 지방노동청에 진정한 사건은 아직도 지방노동청이 '조사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 포항에서는 사업주가 임금체불 혐의로 지난 1월에 구속되고, 경남 통영에서는 지난해 10월 폐업 후 잠적했던 사업주가 이달 초 구속됐지만 각각 80명, 120여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체당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면 외국에서는 도산이 아니어도 긴급하게 체불 노동자를 구제해 주고 있다. 호주와 벨기에는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거나 재정이 악화돼 임금을 못 줄 때도 체당금을 지급한다. 또 상한액을 두고 최근 3개월치 임금 또는 휴업수당 및 최종 3년간의 퇴직금을 지급하는 우리와 달리 호주는 상한액 없이 미지급 임금을 전액 지급하고 있다. 실제로 체임 발생은 도산한 기업보다 운영 중인 기업에서 더 많아 체당금 지급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인도 요리사들의 사건을 대리하고 있는 최미숙 노무법인 노사 노무사는 "6개월 가까이 식당이 휴업하고 싱크대 테이블 등 집기류도 다 빼갔으면 도산을 인정하고 노동자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며 "출국도 못 하고 식당에서 지내는 인도 요리사들은 어쩌면 좋으냐"고 말했다.
인도 요리사들은 법무부가 폐업 미확정을 이유로 취업사업장을 변경해주지 않아 다른 식당 일도 못하고 있다. 나지르씨는 "몇 달째 집에 월급을 보내지 못해 가족들이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생활하고 있다. 다음달?여동생이 결혼을 해 밀린 임금을 빨리 받아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사업주에 솜방망이 처벌보다 이행강제금 부과해야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임금 체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사업주에 대한 경제 제재를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현장의 실무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악의적인 임금 체불 사업자를 엄격하게 사법처리하고, 상습적인 체불 사업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등 다양한 제재 강화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적용되고 있는 처벌의 수위가 너무 가벼워 이를 악용한 임금체불 관행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현행법상 임금 체불 사업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지만 지난해 5만3,000여건의 사법처리 중 징역형은 10명 안팎에 불과했다.
서울지역 한 지방노동청 관계자는 "형사처벌을 해봐야 체불임금의 10~15%에 해당하는 벌금만 내면 그만이니 사업주들이 체불을 반복한다"며 "형사처벌보다 임금 지급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사업주에게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등 경제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처럼 정부가 강제 추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박문배 법무법인 비젼 노무사는 "체불 임금이 발생하면 정부가 먼저 노동자에게 체당금을 지급한 후 사업주에 대한 압류 등 방식으로 사후에 추징하면 사업주도 쉽게 체불을 못 하고, 노동자도 당장 체임으로 인한 생계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체불 사업주에 대한 경제적 제재는 체불 임금에 연 20%의 지연이자를 지급하도록 한 '미지급 임금에 대한 지연이자'가 유일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제 변제하는 사례가 드물고, 사업주가 체불임금을 내도록 강제하는 효과가 미미하다.
근본적으로 정부가 사후처리보다 예방과 감독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도 절실하다. 고용부는 근로자 보호대책은 내놓지 못한 채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 등 사후 처리에만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장형창 건설노조 교육선전국장은 "대표적인 임금 체불 업종인 건설업의 경우 다단계 하도급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원청기업이 하청기업에 대한 감독만 제대로 해도 체불 문제 상당 부분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고용부가 건설업계 원청기업에 대한 감독을 철저히 해서 임금 체불이 발생하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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