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쿠바의 최고권력자 두 사람을 잇따라 만났다. 27일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과 55분 동안 공식 회담한데 이어 이튿날엔 라울의 친형이자 50년간 쿠바를 통치했던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도 성사됐다.
이들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쿠바 정부가 14년 만에 무신론 국가를 찾은 로마가톨릭 수장을 극진히 대접한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라울은 공항에 나와 두 손까지 공손히 모으며 교황을 영접했고, 피델은 "기쁜 만남이었다"는 소감을 온라인 매체에 남겼다.
그러나 교황에 대한 극진한 환대를 쿠바 정치체제의 변화의 징후로 보기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마리노 무리요 쿠바 경제장관은 27일 "우리가 할 일은 쿠바식 사회주의를 지속시키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산주의는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쿠바는 새롭고 열린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교황의 비판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베네딕토 16세의 목소리는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에 비해 강력하고 분명했지만 쿠바 정부의 반응은 차가웠다.
쿠바 지도부의 자신감은 자체적으로 진행 중인 개혁 조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변화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교회가 협조적 자세로 돌아선 것도 정부에 힘을 실었다. 실제 라울 카스트로 의장의 경제개혁안은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개인사업자 자격증을 손에 쥔 국민이 벌써 20만명을 넘어섰다. 14년 전이라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쿠바 가톨릭은 경제분야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완만한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 상부 기관인 교황청이 인권문제로 정부와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과 달리 쿠바 교회는 정치적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한다. 쿠바의 유명 반체제 블로거인 요아니 산체스는 "이제 마음대로 떠들 수는 있어도 여전히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범죄"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교황에게 예를 다한 라울 카스트로나 작심하고 쿠바 정부를 깎아내린 교황이나 모두 정치적 제스처를 취한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라울은 교황청을 존중한다는 인상을 줬고 교황도 가톨릭 수장으로서 쿠바의 독재를 방관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남겼다"며 "서로에게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라고 전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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