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버스에 붙어 있는 결혼정보업체의 광고를 보고 흠칫했다. 아버님 퇴직하신다, 결혼해듀오. 하루종일 껄쩍지근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아버님이 퇴직하시는 것과 청혼이 무슨 상관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옆에서 친구가 "바보야 부조금 모아야 될 거 아니냐"고 까닭을 알려 주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자꾸 되씹게 되었다. 아버님 퇴직하시니까 결혼해 주오. 물론 그 핑계로 청혼하는 거라면 귀여울 수도 있지만 결혼정보업체라는 것이 워낙 서로의 조건을 가장 효율적으로 매칭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보니 귀엽게 보일 리 없다. 다들 시간 없고 바쁜 현대 사회에서 결혼정보업체라는 존재가 씁쓸하다기보다, 결국 문제는 '아버님 퇴직하신다'에 있었다. 물론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옛말도 있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사람들이 돈돈거리는 걸 좀 민망해하는 느낌이라도 있었던 것 같다. 너무 돈돈거리는 사람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는 분위기라도 있었다. 요즘은 그런 사람을 보면 그래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며 너도나도 반성한다.
옛날이라는 시점을 굳이 꼬집어 말해 보자면 역시 IMF 전후일 것이다. 그 전에는 꿈이 뭐야, 하고 물었을 때 돈 많이 버는 거! 하고 딱 잘라 말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젠 꼬마들도 돈 많이 버는 거요! 해서 물어본 내가 바보 멍청이같이 느껴진다. 확실히 IMF 이후로 산다는 것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것은 명품 백이나 시계, 아니면 스포츠카 이상의 사치가 되어 버렸다. 외국 물 먹어보고 싶은 욕심은 없지만 다른 나라도 죄다 우리나라처럼 사는 게 힘들다는 말만 하는지 궁금하다. 그럴 만한 것이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일은 재미있어? 라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십중팔구 돈 때문에 하는 거지 뭐, 이런 거라 그렇다. 문화예술 분야처럼 자기가 재미 느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굶어 죽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놀 때도 빨리 재미있으려고 돈 쓰고 논다. 쇼핑이든, 영화 구경이든, 그게 가장 즉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니까 그렇다. 돈 안 쓰고 노는 법 같은 건 모두가 까먹었다.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돈 버느라 놀 시간도 많지 않다. 억지로 시간을 만들면 짧은 시간 내에 최대의 재미를 찾아야 하니까 일하듯 논다. 월급 꼬박꼬박 주는 회사를 때려치웠던 건 정신 차리고 보니 놀려고 일하고, 물론 우리가 시장경제 하에 살고 있긴 하지만 놀 시간이 충분하질 않으니 빨리 효과 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돈 쓰면서 놀고, 또 그 돈 메꾸려 또 일하고 있는 게 보였을 때였다. 이후 몇 년 동안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도서관에서 책 빌려다 읽는 재미로 살았지만, 어머님이 편찮으신 바람에 이 재미도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취업 정보를 뒤적거리다 한숨이 나왔다.
사실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도 일본의 '프리터'라는 말이 주는 어감처럼, 딱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잘리는 것이나 자유로웠을까. 하루 12시간씩 비정규 노동을 해도 벌이는 88만원 될까 말까 했다. 될 수 있는 한 돈 안 쓰고 숨만 쉬고 살았으니 그나마 견딘 것이다. 죽도록 일하는 건 비정규직이나 정규직이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수입에 상관없이 100만원 받아도 죽도록 일하고, 200만원 받아도 죽도록 일하고, 300만원 받아도 죽도록 일하는, 다들 죽도록 일하는 사회가 잘 굴러가고 있는 게 맞는 것일까. 돈돈거릴 때 이토록 거리낌이 없는 게 맞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적당함'이란 앞으로 절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노는 거 말고, 돈은 적어도 좋으니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고 싶다고 속마음을 뱉으면 아마 모두 나를 혼낼 것이다. 그렇게 호락호락한 정신으로 살아남겠어! 하고, 그러나 살아남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참 갈 곳이 없다. 어쨌거나 아버님 퇴직하신다고 청혼하는 남자는 별로일 것 같다. 물론 나는 듀오에서 받아 주지 않을 테니 그럴 일도 없겠지만.
김현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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